"상대는 사법부의 속성을 잘 아는 부장판사 출신의 노련한 변호사로, 세관이 확보하기 어려운 자료와 그럴싸한 논리로 재판부를 설득하고 있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의 매일 수만 장에 달하는 자료 검토와 증거수집, 토론, 서면을 작성하다보니 막차를 놓칠 때도 잦고 몸도 피곤합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리라 믿으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1년 전 디아지오코리아 과세 소송을 담당하던 관세청 직원의 이야기입니다. 관세청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밤잠을 설쳐가며 열정을 바쳤는데요. 관세청 사상 최대의 소송이었던 만큼, 직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다소 맥 빠지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세금 3500억원이 걸린 디아지오코리아와 관세청의 소송은 '합의'로 막을 내린 겁니다. 당초 관세청이 매긴 세액의 70% 정도만 받는 것으로 '흥정'을 매듭지었죠.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이 소송에선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었습니다.
10여년 전 관세청 직원의 뇌물수수 사건에서 촉발된 디아지오와의 과세 분쟁은 전관예우와 외교적 마찰 등 숱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양측의 합의로 판결문 자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됐는데요. 그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묵은 취재 수첩을 다시 꺼내봅니다.
▲ 디아지오코리아의 '윈저' 위스키 |
◇ 은밀한 거래로 혈세 낭비
관세청 서울세관에 기업심사 업무를 담당하던 조모씨는 2004년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됩니다. 당시 위스키 수입가격 문제로 기획심사를 받고 있던 디아지오코리아가 "좀 봐달라"며 1억원을 제시한 겁니다. 고심하던 조씨는 '검은 돈'을 받기로 마음 먹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담당자가 뇌물로 매수된 이상, 과세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었죠. 서울세관은 그해 4월 디아지오코리아에게 139억원을 추징하는 대신 583억원을 환급해줍니다. 세금을 더 걷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444억원의 국민 혈세를 갖다바친 겁니다. 그리고 조씨는 7월에 1억원의 '성공보수'를 챙깁니다. 디아지오 입장에서도 1억원을 주고, 444배로 돌려받았으니 로또가 부럽지 않은 장사였죠.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검찰에 발각됐고, 조씨는 2007년 징역 5년을 선고받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세청 동작세무서는 조씨가 받은 1억원의 뇌물에 4800만원의 소득세까지 물렸는데요. 이미 국가로부터 뇌물을 몰수당하고도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했던 조씨는 조세심판원과 서울행정법원에 불복해봤지만 과세를 뒤집진 못했습니다.
◇ 세금 깎기의 '달인'
뇌물 사건이 드러난 후 서울세관은 더욱 강도 높은 조사에 착수합니다. 디아지오가 2004년 3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수입한 위스키 가격이 너무 낮았다며 2064억원의 세금을 통지하는데요. 그런데 디아지오가 새로운 과세 논리를 펴면서 세관의 일부 과실도 드러났고, 결국 2009년 12월 과세금액을 1940억원으로 줄여서 통보합니다.
이때부터 디아지오는 본격적인 과세 뒤집기에 나섭니다. 조세심판원은 2년간의 고심 끝에 관세청이 디아지오에 261억원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재조사'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립니다. 적극적인 과세 불복에 나선 디아지오는 최초 부과 세액보다 400억원 가량 줄일 수 있었죠.
바통을 이어받은 서울행정법원은 3년을 끌다가 양측의 합의를 권했고, 최근 디아지오와 관세청이 법원의 중재안을 수용하면서 오랜 과세 분쟁은 일단락됐습니다. 디아지오가 낼 세액은 3500억원 중 70%인 2450억원인데, 거기서 가산세를 돌려주고 나면 결국 디아지오가 내야 할 세금은 약 2000억원이 됩니다. 그동안 관세청이 부과한 세액이 3500억원을 넘었으니, 소송 과정에서 1500억원 가량 깎은 셈입니다.
◇ 전관을 앞세운 로펌
디아지오가 거액의 세금을 절반으로 깎을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바로 로펌(법무법인)입니다. 사상 최대의 소송 금액이 걸린 만큼 로펌들의 경쟁도 치열했는데요. 처음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대리인으로 선정했다가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교체하고, 두 로펌이 공동으로 소송을 진행하다가 마지막 법률 소송은 태평양이 빠지고 김앤장이 주관했습니다.
이들 로펌은 전직 부장판사를 포함해 분야별 전문가 10명이 넘는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렸습니다. 막강한 맨파워를 앞세운 로펌들은 심판원에서 '재조사', 법원에선 '합의' 등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결론을 이끌어냈죠.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소송이 길어질수록 디아지오가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관세청 2인자들의 행보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관세청 차장을 맡았던 박진헌 김앤장 고문에 이어 손병조 태평양 고문(2008~2010년), 이대복 김앤장 고문(2010~2011년) 등 실세들이 로펌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들이 퇴직 후 로펌에 근무한 시점과 김앤장과 태평양이 디아지오 소송을 수임하던 시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만큼, 보이지 않은 '전관예우'가 작용했다는 의혹이 나옵니다.
▲ 로펌에 재취업 한 박진헌(김앤장), 손병조(태평양), 이대복(김앤장) 전 관세청 차장 |
◇ 관세청은 왜 물러섰나
1년 전까지만해도 관세청 관계자들에게 디아지오 소송에 대해 물어보면 한결같이 "무조건 이긴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양보나 타협은 '절대 불가' 입장이었죠. 로펌에선 '50대 50'의 합의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지난해 법원이 조정안을 제시한 이후 관세청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법원이 3년의 장고 끝에 내놓은 조정안을 거부하면 판결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죠. 결국 관세청은 법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합의'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최근 관세청이 풀무원과의 소송에서 패한 것도 적잖은 부담이었습니다. 법원은 관세청의 부실 과세를 지적하며 430억원의 세금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는데요. 법원의 납세자 친화적 판결 분위기와 대형 소송 패소에 대한 위기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합의를 완강히 거부하던 디아지오에서도 때마침 법원의 조정안을 수용한다고 나서면서 갈등은 일사천리로 봉합된 겁니다.
◇ 풀리지 않는 의문점
법조계에서는 이번 소송 결과에 대해 갸우뚱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소송을 그대로 진행해도 관세청이 세액의 70% 정도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다는 시각입니다. 관세청의 유일한 약점은 기존에 디아지오에 제대로 세금을 안내하지 않았다는 '신의성실'의 문제인데, 추가로 과세한 2000억원에는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한 대형로펌 관계자는 "서울세관이 2차에 과세한 2000억원 부분은 과세 기준을 변경한 이후의 신고분이라서 신의성실의 약점은 없다"며 "과세금액 3500억원 중에 최소 70% 이상은 받아낼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지적합니다. 관세청이 가만히 있어도 70%를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합의를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어떤 논리가 맞았는지 검증해볼 방법도 없어졌습니다. 과세의 전후사정을 밝혀줄 '판결문'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죠. 유사한 상황에 처한 기업이나 세무대리인들도 판례를 참고할 기회를 잃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상 최대의 관세 소송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