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알지? 도망가면 네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을거야."
"국장님, 시키는대로 다 할테니 가족만은 제발 살려주세요."
정육점 집 딸 김모씨는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체국에 취직했습니다. 부속실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어느 날 우체국장한테 불려가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요.
우체국장 이모씨는 본처가 있는 47세 유부남이었는데 그녀에게 애인이 돼 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녀가 단칼에 거절하자 이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든 모면해보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고통만 쌓여갔죠. 결국 그녀는 1년 만에 우체국을 그만두고 고속버스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하지만 이씨는 옮긴 회사까지 찾아와 들볶았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겁을 줬는데요. 끔찍한 협박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이씨와 동거를 시작했고 그들의 질긴 인연은 40년간 이어졌습니다.
▲ 그래픽/변혜준 기자 jjun009@ |
#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
우체국장 이씨는 지역 경찰서장과 정보부 직원들과도 자주 만났는데요. 이를 지켜본 그녀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접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부모도 이런 사실을 알게됐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정육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1988년 딸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아파트를 한 채 사줬습니다. 아파트는 그녀의 유일한 재산이자 보금자리였지만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 저당을 잡혔습니다.
이씨의 본처가 뇌병변으로 쓰러지면서 생활비와 간병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자 이씨가 아파트를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린 겁니다. 그나마 다행은 이씨가 자신의 퇴직 연금으로 대출 이자를 부담했고 2012년에는 원금도 갚았다는 점입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그녀는 56세였던 2010년에 뇌출혈로 쓰러지고 패혈성 쇼크로 거동도 불편해졌습니다. 본처와 후처의 병이 지난날 자신의 패악질 때문이라고 자책한 이씨는 2013년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 "사모님, 증여세 내셔야죠"
이씨가 사망한 지 1년 후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국세청이 상속 재산을 조사하다 이씨가 여자의 아파트 대출금을 상환해 준 걸 잡아내고 증여세를 부과한 겁니다.
그녀는 대출 받은 돈은 이씨가 사용했고 그걸 갚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국세청은 증빙 자료가 없다며 믿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대출 받은 은행이 파산하면서 전표가 파기돼 과거 기록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평생 혼인신고도 못하고 내연녀로 살아온 그녀는 이씨의 재산을 물려받기는커녕 오히려 돈까지 빌려주다가 세금만 내게 됐는데요. 그녀는 세무대리인을 통해 조세심판원에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조세심판원은 그녀가 이씨에게 돈을 빌려주고 상환 받은 과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봤습니다. 그녀의 아파트 등기부등본을 보니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은 사실이 있었고, 대출 이자를 이씨의 연금으로 낸 점도 통장 입출금 내역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녀의 사연을 모두 들어본 심판원은 국세청에 과세를 취소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심판원은 "2012년 대출상환금을 갚은 후 은행의 근저당권이 모두 해제된 점을 감안할 때 대여금을 반환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채무변제액을 사전증여재산으로 보고 증여세를 과세한 처분은 잘못"이라고 밝혔습니다.
*증여와 채무변제 타인으로부터 재산을 무상으로 넘겨 받으면 증여세 과세대상이 된다. 채무자가 채권자로부터 `채무면제`를 받아도 채무액만큼 증여 받은 것으로 본다. 다만 타인에게 돈을 빌린 뒤 갚는 경우(채무변제)는 증여세가 성립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