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요리는 종종 예술작품에 비유되곤 합니다. 셰프는 접시라는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철학과 재료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수만 번의 칼질로 하나의 작품을 만듭니다. 예술가들의 그것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죠. [셰프의 Pick]은 그들의 이런 노력을 담아냅니다. 국내 호텔 셰프들의 이야기와 요리에 담긴 철학 한 조각을 음미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최고의 셰프들이 전하는 화려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맛 보실 준비가 되셨나요? 이제 출발합니다. [편집자]
1990년 경주호텔학교에서 요리를 배우던 한 청년이 35년 뒤 다시 경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국제행사를 총괄하는 총주방장 자격으로 경주 땅을 밟았다. 지난해 경주 APEC 국제행사 메뉴를 총괄한 우현모 소노캄 경주 조리 총괄 셰프 이야기다.
우 셰프는 경주를 '처음과 끝이 다시 이어진 곳'이라고 표현했다. 뉴욕과 이탈리아에서 쌓은 경험, 조선호텔 시절 전국을 돌며 식재료를 찾아다닌 집념 그리고 국제행사를 치러낸 시간까지 그의 35년 요리 인생은 긴 우회 끝에 다시 경주로 향했다. 지난 8일 경주에서 만난 우 셰프는 '식객 주담정육'부터 APEC 정상 만찬 그리고 경주라는 도시가 가진 미식의 스토리까지 자신의 철학을 풀어냈다.
수미상관(首尾相關)
우 셰프에게 경주는 단순한 근무지가 아니다. 요리를 처음 시작한 출발점이자, 셰프로서의 초심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1990년 '요리 사관학교'로 불리던 경주호텔학교에서 처음 요리를 배웠다. 지금의 소노캄 경주 바로 인근이다.
우 셰프는 "다시 경주에서 셰프로 일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며 "발령받고 와 보니 예전에 다녔던 호텔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생 때 밤새 실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돌아봤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두고 "수미상관(首尾相關) 같다"고 표현했다. 요리를 시작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와 커리어의 정점을 맞이하게 돼서다.
1993년 웨스틴조선호텔에 입사한 그는 메인주방과 연회주방을 시작으로 아이리시 펍 '오킴스', 프렌치 레스토랑 '나인스게이트',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키아에누보' 등을 두루 거쳤다. 안정적인 커리어 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결혼 한 달 만에 이탈리아로 떠나 세계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ICIF(Italian Culinary Institute for Foreigners) 마스터 과정을 밟았다.
우 셰프는 "그곳에서 배운 건 단순한 조리 기술이 아니었다"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기 문화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음식에 담아내는지를 직접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 경험은 훗날 경주의 역사와 지역 스토리를 음식에 녹여내는 현재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2021년 소노에 합류한 그는 소노캄 여수에서 3년간 조리 조직을 이끈 뒤, 지난해 소노캄 경주 리뉴얼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당시 현장은 사실상 '빈 도화지'에 가까웠다.
우 셰프는 "원래 공사 기간이 2년 이상 예정돼 있었지만 국제행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오픈 시기를 앞당겨야 했다"며 "정육 레스토랑과 한식당, 뷔페, 카페 등 큰 방향만 정해져 있었고 실제 콘셉트와 운영 방식은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어 "공간의 성격부터 메뉴 구성, 서비스 방향까지 하나씩 채워 넣으며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고 덧붙였다.
한식당 '소담'은 정갈한 반상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앞세웠다. 뷔페 레스토랑 '담음'은 제철 식재료 기반의 연회·코스 메뉴까지 아우르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페 '오롯'에서는 보문호 전망과 함께 찰보리·팥 등을 활용한 디저트를 선보이고 있다. 로비 라운지에서는 핸드드립 커피와 보리 음료 등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쳤다.
하이엔드 비스트로 '주담정육'
소노캄 경주에서 우 셰프가 직접 선정한 대표 메뉴는 구이 레스토랑 '식객'의 시그니처 코스 '주담정육'이다. 그는 기존 정육식당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품격 있는 하이엔드 비스트로 형태로 공간을 풀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보통 정육식당은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방식이 대부분"이라면서 "그걸 고급 레스토랑처럼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 방식이 아니라, 셰프가 맡김차림 형태로 풀코스를 내보자는 아이디어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주담정육'은 육회와 죽, 카르파치오, 육전, 모둠구이, 식사 메뉴까지 순서대로 이어지는 코스 구성이다. 직원이 테이블마다 직접 고기를 구워주는 서비스도 차별화 요소로 꼽힌다.
이름에도 의미를 담았다. 우 셰프는 "'주담정육'은 술(酒), 이야기(談), 고기(肉)를 뜻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9시 이후에는 바(BAR) 형태로 운영하며 와인과 안주 메뉴도 함께 선보인다. 그는 이를 두고 "정육식당을 넘어 하이엔드 비스트로 개념을 접목한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고객 반응도 긍정적이다. 그는 "처음 방문한 고객들이 '여기가 정말 구이 레스토랑이 맞느냐'며 놀라는 경우가 많다"며 "대기업 회장님들이 방문해 식사를 한 뒤 '오래오래 이 자리에서 운영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가시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결국 기교보다 중요한 건 원재료의 품질"이라면서 "주담정육은 내가 오랜 시간 요리를 하며 얻은 '본질에 대한 확신'을 담아낸 차림상"이라고 강조했다.
음식으로 하는 외교
우 셰프 커리어의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는 2025 경주 APEC 국제행사였다.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행사 2주 전에 제안을 받았는데 이미 청와대 시식 일정까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며 "기획부터 실제 메뉴 구현까지 시식 일정에 맞춰 모두 끝내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식재료 확보에 나섰다. 우 셰프는 "시식 당일 사용한 재료와 행사 당일 재료가 완전히 동일해야 했다"면서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자연송이와 무늬오징어, 완도 광어 같은 식재료를 모두 확보해야 했다"고 말했다.
특히 자연송이 수급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산불 여파로 생산량 자체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매팀과 거의 전쟁하듯 움직였다"며 "어떻게든 구해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국을 수소문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확보한 식재료 위에 경주의 역사성과 한국 식재료의 스토리를 담아낸 코스가 완성됐다. 한우와 랍스터, 해산물냉채, 김치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디저트로는 경주의 월지(月池)를 형상화한 '월명'을 올렸다. 김치는 동그란 볼 형태로 구현해 시각적인 완성도까지 더했다.
그는 당시 메뉴 구성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로 '스토리'를 꼽았다. 우 셰프는 "한우나 참나물, 광어 같은 재료 자체는 어쩌면 익숙할 수 있다"며 "하지만 어떤 지역에서 왔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순간 분위기와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음식은 단순히 맛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경험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우 셰프는 당시를 '미식 외교의 현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순간을 현장에서 많이 봤다"면서 "음식이 단순한 식사를 넘어 외교와 관계를 연결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직접 체감했다"고 밝혔다.
우 셰프는 "2025 APEC을 치르면서 소노캄 경주도 단순한 숙박 공간을 넘어 국제행사를 치러낸 하나의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며 "방문객들이 이곳에서 경주만의 품격과 스토리가 담긴 미식을 경험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자는 감자 맛이 나야 한다"
우 셰프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철학은 '본질'이었다. 그는 "요리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더 맛있게 하려고 기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치찌개는 김치찌개다운 맛이 나야 하고, 프렌치 요리는 프렌치 요리다운 본연의 맛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재료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주요 식재료 소싱을 직접 챙길 만큼 재료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 셰프는 "요리는 밭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주방에서 기교를 부려도 재료의 벽은 넘을 수 없다"면서 "과일도 아침에 들어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바로 반품한다. 결국 재료가 기본이고 본질"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 같은 철학은 향후 구상에도 이어진다. 그는 언젠가 경주 사업장 내 자체 농장을 운영해 직접 키운 식재료를 테이블에 올리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는 구상도 내놨다. 우 셰프는 "직접 키운 식재료를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다면 소노 전체 식음 품질도 한 단계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건 경주라는 도시가 가진 '시간의 힘'이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천년의 역사와 서사를 품은 도시라는 점에서다. 우 셰프는 "경주는 결국 역사와 이야기로 기억되는 도시"라며 "그 천년의 감성과 시간을 음식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결국 음식은 단순히 맛만 소비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찰보리와 팥 같은 지역 특산물을 빙수와 팬케이크, 차 메뉴에 활용하는 이유도 결국 경주의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셰프라는 직업의 본질을 다시 꺼냈다. 우 셰프는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사람 마음속 허전함까지 채울 수 있어야 한다"며 "수많은 셰프가 뜨거운 불 앞에서 피와 땀으로 음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팀은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품격과 스토리를 꼭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