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전환(Digital transformation)"
모든 보험사들이 입을 모아 부르짖는 말이다. AI(인공지능)과 블록체인,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보험산업 접목과 함께 언택트(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그야말로 '디지털' 전국시대가 열렸다.
은행과 증권, 카드 등 다른 금융권을 비롯해 각종 혁신서비스로 무장한 핀테크(FinTech, 금융+기술의 합성어)와 인슈테크(InsurTech, 보험+기술의 합성어), 네이버와 카카오 등 빅테크(BigTech, 대형 정보통신기업)까지 가세하면서 경쟁 구도가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보험사들은 여기에 맞서 '보험 본연의 업무'와 '고객경험 확대'에 초점을 맞춰 디지털화에 나서고 있다. 보험사 핵심 업무인 '보험 가입-심사-체결-유지-보험금 지급-관리'의 모든 단계에서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며 기존 보험앱들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언택트 보험 경험을 높이고 있다.
◇ 보험업무 전반 디지털 전환 총력
보험사들은 우선 기존에 우편을 활용하던 보험 안내장과 약관, 보험증권 등을 디지털로 전달하고, 보험금도 앱을 통해서 청구할 수 있도록 개선에 나서고 있다. 보험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형사의 경우 연간 우편 안내장만 3000만 건, A4용지 5000만 장에 달한다. 이를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우편물 분실 등에 따른 개인정보와 환경 보호는 물론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보험사 앱을 통해 가입한 보험상품을 확인, 관리하고 보험금을 청구하는 건 이미 보편화되고 있다. 인터넷 웹페이지나 모바일 채팅 앱에서 AI 보험 챗봇을 통해 궁금한 점을 묻고 실시간으로 답을 들을 수 있으며 보험상품에 바로 가입할 수도 있다.
보험설계사들은 종이서류 없이 태블릿으로 보험상품을 소개하고, 시각화된 보장분석 이미지를 제공한다. 보험사는 고객 관리와 계약정보 조회, 컨설팅, 계약을 진행할 수 있는 영업지원 시스템을 직접 개발하거나 외부 인슈테크사와 협업해 제공한다. 상품 컨설팅은 물론 경제 이슈와 금융시장 동향, 영업전략 등 아침 조회를 통해 전달했던 각종 콘텐츠도 언택트로 제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있다.
공인인증서에 의존하던 복잡한 인증 방식도 모바일이나 페이 등을 통한 간편 인증을 도입하고 있다. 병원비를 계산하면서 바로 실손보험을 청구할 수 있는 병원도 생겨나고 있다. 핀테크와 테크핀 등과 협업해 고객 맞춤형 상품 개발과 서비스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 소비자 부정적 인식 탓 성과 알리기 고심
다만 소비자들에게 디지털 전환의 성과를 내비치는 데는 고심이 있다. 대부분의 성과가 프로세스 개선 사안이다 보니 기존에 보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고객들에겐 오히려 이런 인식을 더 강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한화생명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보험가입심사(언더라이팅) 시스템으로 보장별 가입 한도를 높여 3년 만에 약 300억원의 보장성 보험료를 추가로 거둬들이는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연간 100억원 규모다. 오렌지라이프와 AIA생명 등도 빅데이터와 AI를 활용한 보험가입심사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연간 100억원의 보험료를 더 거둬들였다'는 내용이 소비자들에겐 오히려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실제 디지털 전환 성과가 크지 않거나 성과가 있지만 외부로 밝히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면서 "우량한 고객들에게 보장금액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는데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보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보니 보험료를 더 거두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보험사기 적발 및 보험금 지급 심사 자동화 부분도 예외가 아니다. 교보생명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보험사기 예측시스템을 개발해 2018년부터 205건, 총 23억원 규모의 보험사기 의심 건을 찾아냈다. 이외에도 DB손해보험, 현대해상, 오렌지라이프 등도 빅데이터, AI를 활용한 보험사기 예측시스템을 개발해 활용 중이다.
오렌지라이프는 보험사기를 계약 시점부터 적발할 수 있는 '보험사기 사전 예측 모델'을 개발해 계약 체결시점부터 보험사기 위험군을 골라낸다. 또 업무 자동화를 위한 RPA(로봇 프로세스 자동화)를 통해 연간 수십억원의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특히 보험금 지급 심사의 경우 소액 지급심사를 자동화하면서 많게는 자동심사를 50% 가까이 끌어올린 곳도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사기 적발시스템을 통해 연간 수십, 수백억원의 보험금 누수를 막을 수 있지만 의심 건으로 경찰조사까지 받았는데 무혐의로 끝난 경우도 있다"면서 "소비자 입장에서는 '보험사기로 의심한다',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한다'식으로 오인할 수 있어 디지털 성과가 아직 양날의 검처럼 여겨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RPA시스템을 도입해 심사 효율성을 높였지만 기존에 10명이 하던 작업이 5명으로 충분하게 되면 인력 축소 이슈가 나올 수 있다"면서 "자동화로 업무 효율성을 높였는데도 인력은 그대로 유지하면 실제론 효율성을 높였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 보험사의 혁신, 실체가 없다?
보험의 디지털전환은 보험산업의 많은 부분들을 바꿨다. 그러나 이 변화들이 다른 금융권이나 핀테크들이 추진하는 변화와 비교해 '혁신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긍정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각에선 디지털 전환 성과로 내세울 실체가 없다는 자조적인 분석까지 나온다.
한 대형사 관계자는 "전사적인 디지털 전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실상 '혁신'으로 부를만한 성과는 거의 없다"면서 "거대 플랫폼을 가진 빅테크와는 기술력 차이가 큰 데다 아직 시행착오 단계에 있어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 인슈테크 기업 대표는 "인슈테크나 스타트업들은 하나의 핵심기술 위주여서 새로운 기술을 추가하거나 바꾸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면서 "반면 보험사는 그와 연결된 뒷단의 모든 기능과 아키텍처(구조)를 바꿔야 해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따라가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 보험사마다 심도나 확장성의 차이는 있지만 기술의 특이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비슷한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핀테크들은 그 서비스를 한데 모아 제공한다. 개별 보험사의 앱을 모두 다운로드할 필요 없이 하나의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자사 고객을 대상으로 만든 앱으로 이미 수백, 수천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거대 플랫폼과의 경쟁이 쉽지 않은 이유다.
◇ 오픈 인슈어런스 도입 필요성 커져
그러다 보니 보험업계도 '오픈'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본격적인 은행 앱 전쟁을 불러일으킨 오픈뱅킹처럼 '오픈 인슈어런스'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픈 인슈어런스란 보험사 데이터와 서비스를 파트너사에 공개하고 협업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최근 KB손보, 삼성생명 등이 빅데이터 판매서비스를 부수업무로 신청했으며, 삼성생명은 통합자산관리 플랫폼인 뱅크샐러드와 금융데이터 교류 협약을 맺고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신용정보원, 금융보안원 등 금융정보와의 결합과 함께 고객 소비, 접근성과 연결된 이커머스 그리고 각종 플랫폼들과 데이터를 연결하고 교환하면 신사업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자체적인 확장은 한계가 있는 만큼 디지털 전환의 성과를 극대화하려면 다양한 기술 기업들과 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