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코인 나오면 인기 좋겠네요. 주가에도 호재일 듯."
최근 한 재생에너지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의 제목입니다. 한국전력의 코인?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긴 합니다. 최근 한전이 블록체인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블록체인' 하면 코인부터 떠올리는 분들이 많죠.
하지만 한전은 암호화폐 사업을 하려고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아닙니다. 내부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블록체인망 구축이 목적입니다. 한전코인을 기대한 사람들이라면 김이 새려나요. 기다려보세요. 이야기를 끝까지 보시죠.
# 한전, 블록체인 통해 문서 검증·인사 관리 시행
한전의 블록체인망 구축은 한전의 연구사업을 담당하는 전력연구원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전력연구원은 최근 'KEPCO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 및 서비스 개발' 용역을 입찰공고했습니다.
제목만 보면 한전이 블록체인을 통해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얘기입니다. 코인 사업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혹시?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서 이번 사업의 제안요청서를 다운로드받아 살펴봤습니다.
우선 한전이 블록체인망을 통해 서비스하려는 분야를 봤습니다.
먼저 '문서 검증 시스템'을 블록체인으로 구축한다고 합니다. 재직증명서나 경력증명서 등을 발급하고 검증하는 절차입니다.
이어 '인사 채용 관리 시스템'입니다. 인사 관련 증명서와 자격증 등의 서류를 접수하고, 채용심사의 성적관리 등을 블록체인망을 통해서 하겠다고 합니다.
제안요청서를 다 뒤져봐도 코인의 'ㅋ'도, 암호화폐의 'ㅇ'도 없습니다. 코인사업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문서 검증이나 인사 채용 같은 내용도 사실 단순한 서류업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한전의 블록체인망 구축은 전력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전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 주업무인 전기공급계약(PPA) 업무에 블록체인 도입
한전은 블록체인망을 통해 '전자문서 공유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입니다. 한전의 각 기관사이에서 데이터를 공유하고 연계한 증명서를 관리하는 업무를 구현할 예정입니다. 특히 'PPA' 업무 관련 증명서를 블록체인으로 관리하겠다고 공지했습니다.
PPA(Power Purchase Agreement)란 전기공급계약을 말합니다. 전기공급계약은 한전의 주업무입니다. 한전은 자회사를 포함한 국내 발전업체의 전기를 모두 사들이는 독점사업자입니다. 이렇게 사들인 전기를 각 기업의 사업장과 일반 소비자에게 공급해주는 일이 한전의 역할이죠.
한전의 전기계약은 수시로 이뤄지는 업무입니다. 매일매일 필요한 전기의 양이 다릅니다. 넘쳐도 문제고 모자라도 큰일이죠.
게다가 최근에는 발전사업자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정부의 에너지 전환정책에 따라 전기를 만들어내는 발전사업자의 수가 매년 크게 늘고 있습니다. 2001년 10곳에 불과한 전력거래소 회원사 수는 지난해 말 기준 4317곳으로 늘었습니다.
당연히 전기공급계약도 많이 발생합니다. 절차가 간단하면 나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전이 공공기관이다보니 계약 절차가 복잡합니다. 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류의 양도 방대합니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리죠. 실시간으로 전력을 통제하는 일은 방대한 서류작업이 필수입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처리과정을 크게 단축합니다. 각 단계의 보증과 검수 과정 등이 대폭 줄어듭니다. 만들어지는 데이터도 안전하게 보관합니다. 확장성도 좋습니다. 이번 블록체인망은 한전 내부 플랫폼에 쓸 예정이지만, 원한다면 외부의 다른 플랫폼과 연결하기도 쉽습니다.
# 당장은 사무업무에…코인 개발 여지는 충분
그렇다면 한전의 코인 사업은 물 건너간 얘기인가요.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블록체인을 도입하기로 한 이상 암호화폐를 이용한 업무를 도입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이미 수년전부터 한전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비즈니스 모델을 설정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력공급 지불시스템 ▲전기차 충전관리 ▲신재생 인증 관리 ▲P2P 전력거래 ▲인사·재무·감사·품질 등 사내 업무 관리 등 5개 분야입니다. 이번 블록체인 네트워크 구축은 업무 관리 분야에 해당하네요.
전력공급 지불시스템과 전기차 충전관리 분야의 성과도 있습니다. 한전은 2017년 말 '블록체인 기반 이웃 간 전력 거래 및 전기차 충전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프로슈머(전기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지붕 위 태양광 등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사람)가 생산하고 남은 전기를 이웃에게 판매하는 사업입니다.
팔고 남은 태양광 전력을 이웃의 전기차 충전에 활용하는 방식은 기존에도 있긴 했으나 어려웠습니다. 먼저 프로슈머가 소비자의 사전 동의를 구한 뒤 한전에 이웃 간 전력거래를 신청합니다. 이어 한전이 거래 가능여부 및 편익을 검토하고 프로슈머와 소비자가 최종 동의할 경우에 협약이 체결됐습니다. 이후 거래비용은 한전의 전기요금으로 정산했습니다. 말로만 들어도 복잡하죠?
절차가 복잡하니 프로슈머와 소비자의 신속한 매칭이 어렵고, 기존 전기요금에서 정산을 받는 방식이니 거래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서 간단하게 해결됐습니다. 실시간으로 프로슈머와 소비자를 매칭하고 전기 판매 대가로 즉시 '에너지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에너지포인트'는 전기요금 납부에 쓰거나 현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암호화폐와 쓰임이 비슷하지 않나요?
이런 형태의 사업은 지금 한전과 발전사업자 사이에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신재생 인증 관리와 P2P 전력거래 시스템으로 블록체인을 확장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에너지포인트처럼 쓸 수 있는 한전코인의 등장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 복잡해진 한전 업무…암호화폐 도입하면 편할 수도
한전코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다고 다 해야 하나요?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수많은 컴퓨터에 동시에 저장하는 기술입니다. 중앙 서버에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와 기록을 공유하고 실시간으로 검증합니다. 결과적으로 데이터 위조나 변조를 할 수 없어서 정보의 신뢰성이 높습니다. 높은 신뢰성 덕분에 제3자가 거래를 보증하지 않고도 개인과 개인이 안전하게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각종 계약이 많은 한전입장에서는 유용한 기술입니다.
비트코인이 인기를 끈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비트코인 이전에 온라인 화폐가 나오지 않던 것은 중앙집권화 상태 데이터는 손상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는 네트워크 전체를 해킹하지 않는 이상 데이터를 조작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전에 전기를 공급하는 수많은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은 정산이 복잡합니다. 전기공급 계약에 따른 매출과 별도로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 시장에도 따로 참여해야합니다. 계산 하나 잘못하면 적자입니다. 이 업무를 대신 해주는 전문업체도 많습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각종 계약의 편의성이 크게 좋아지겠죠. 에너지포인트와 같은 암호화폐를 개발해 지불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호주는 전기공급계약에 블록체인기술을 도입한 뒤 암호화폐까지 만들어 상장해 거래 중입니다.
한전도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암호화폐 관련 사업과 연계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려도 있습니다. 암호화폐 시장은 아직 투기 문제에서 자율롭지 못합니다. 만약 한전코인을 상장하고 일반이 거래한다면 전력시장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에 대한 해결법도 있습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개방성이 큰 장점이지만 바깥에 경계선을 치는 것도 가능합니다. 미리 정해진 개인이나 조직만 참여할 수 있는 프라이빗 블록체인(Private Blockchain)망을 구성하면 되니까요. 투기꾼들은 아쉬워하겠지만 전력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크게 편리해집니다.
# 코인보다는 업무 선진화에 방점…광역 에너지 네트워크 구축 목표
이미 수많은 기업이 블록체인 플랫폼과 서비스 개발에 막대한 투자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해득실에 따라 협력과 경쟁을 반복하면서 서비스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전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전코인은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한전은 블록체인 네트워크 활용 목표에 대해 이미 공개한 내용 외에는 말을 아꼈습니다.
확실한 건 한전도 블록체인을 전력 분야의 선도적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력 뿐만 아니라 다른 에너지 분야를 포괄하는 광역 에너지 네트워크를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구축하겠다는 게 한전의 큰 그림입니다.
코인이 안나오면 뭐 어떤가요. 긍정적인 변화는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