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안구건조증 치료제를 개발 중인 A사는 임상3상 결과 1차 평가지표의 통계적 유의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다만 회사는 '임상적·상업적으로 더 의미있는' 2차 평가지표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확보, 해당 임상이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다.
#사례 2. 표적항암제를 개발 중인 B사는 위암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3상의 중간 분석(톱라인) 결과 1차 평가지표 목표치를 도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두 달 뒤 최종 결과에서 다른 세부 데이터를 분석했을 때 '임상적 유의성'을 확인, 결과적으로 임상에 성공했다고 입장을 바꿨다.
#사례 3. 면역혈소판감소증 치료제를 개발 중인 C사는 임상2상 톱라인 결과 공시 후 하루 만에 정정했다. 통계적 유의성을 입증하는 지표인 P값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최종 공시에 따르면 회사는 1차 평가지표의 목표치를 달성했으나, P값 확보에는 실패했다. 이와 관련해 회사 측은 "이번 임상의 환자 표본수가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할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면서도 "이번 임상은 자사의 약물이 경쟁 약물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효능을 낸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불투명한 공시는 고질적인 문제로 꼽힙니다. 임상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특정 데이터를 누락하거나 자세하게 명시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또 안 좋게 나온 주요 평가지표 대신 보조 평가지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투자자 혼란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거래소는 최근 '코스닥시장 제약바이오 기업을 위한 포괄공시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내놨습니다. 앞서 거래소는 지난 2020년 제약바이오 업종 포괄공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바 있습니다. 당시 거래소는 각 기업이 경영 활동의 중요 정보를 스스로 판단해 공시하도록 하되 제약바이오 기업이 공시해야 할 주요 항목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제약바이오 기업의 '부실 공시' 논란이 이어지면서 거래소가 가이드라인을 정비한 것입니다. 개정안은 오는 5월 2일부터 시행합니다.
개정안에서 주목할 점은 △임상 공시 표준서식 도입 △임상 공시에서 1차 평가지표 기재 의무화 등입니다. 우선 거래소는 제출 빈도가 높고 유형화할 수 있는 임상 공시 항목 6개에 대해 표준서식을 제공합니다. 중요한 정보가 빠지거나 주관적 표현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6개 항목에는 ①임상계획승인신청 ②임상계획승인 ③임상결과 ④자진취하 ⑤변경승인신청 ⑥변경승인 등이 해당합니다.
임상 계획이나 결과를 공시할 경우에는 반드시 임상계획서(프로토콜)에 기재된 1차 평가지표를 기재하도록 했습니다. 투자자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2차 평가지표 기재는 지양한다고 했고요. 다만 하위 분석이나 2차 평가지표가 중요한 정보에 해당하면 이를 '전부' 기재하고, 이들 정보는 1차 평가지표와 구분해 '기타 투자판단 관련 중요사항'에 기재하도록 했습니다.
이밖에 개정안에 따르면 제약바이오 기업은 임상계획신청(IND) 승인 공시 시 임상시험 계획서(프로토콜)와 함께 임상정보확인서를 반드시 별도로 제출해야 합니다. 임상정보확인서는 1차 평가지표 및 통계 분석 방법 등 주요 정보를 포함한 문서입니다. 임상정보확인서에 없는 내용은 IND 승인 공시는 물론 향후 임상 결과 공시에도 기재할 수 없습니다. 또 거래소는 투자자가 임상 진행 경과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기업이 임상 공시에 임상등록 사이트 주소나 임상 등록번호 등을 포함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이번 개정안의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장기간 막대한 비용을 신약 개발에 투자하는 제약바이오 기업은 대부분 수익구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매출이나 영업이익으로 기업의 가치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기업이 보유한 신약 후보물질을 보고 기업의 성장성을 예측합니다. 실적 공시보다 임상 공시가 더욱 중시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제약바이오산업은 고도의 기술력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반면 산업에 대한 개인 투자자의 이해도는 충분하지 않은 편입니다. 기업이 공시한 임상 내용을 해석하기도 어려운 데다 임상이 해외에서 장기간 이뤄지는 경우 정보 비대칭성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시는 투자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죠. 개정안 시행이 업계의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전반적인 신뢰도를 높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옵니다.
다만 개정안을 향한 우려도 있습니다. 1차 평가지표의 의미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안전성 데이터나 보조 평가지표 등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의약품이 심사기관으로부터 시판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안전성과 유의성을 모두 입증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약품의 치료 효과가 좋아도 부작용이 심각하다면 시판허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개정안의 공시 의무 항목에 안전성 데이터는 빠진 상황입니다.
또 유의성 입증을 위해서는 약효를 시험을 통해 증명하는 '통계적 유의성'과 의료진이 약효를 임상적으로 판단하는 '임상적 유의성'을 모두 만족해야 합니다. 임상적 유의성은 의약품 허가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잠재적 편익을 의료진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인데 대체 치료법 없는 경우, 통계적 유의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의료진이 시판허가를 권고할 수 있습니다. 이때 보조 평가지표 등이 근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즉, 1차 평가지표는 의약품이 시판허가를 받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지만, 이것만이 시판허가를 완전히 결정하진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실제 얀센의 항암제 '욘델리스'(성분명 트라벡테딘)는 임상3상에서 1차 평가지표의 통계적 유의성 확보에 실패했지만 2차 평가지표 등을 통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시판허가를 획득한 바 있습니다. 개정안 시행이 자칫 투자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배경입니다. 여기에 1차 평가지표만 공시하면 된다는 점을 악용해, 기타 중요한 데이터를 숨기는 사례도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 개정안을 두고 의견은 엇갈리지만 지향점은 같습니다. 투명한 공시로 업계 신뢰도를 회복하겠다는 목표입니다. 외부에서 조달한 자금에 의존하는 산업 특성상, 제약바이오 기업이 투자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불투명한 임상 공시는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신뢰도가 저하된 주된 원인이죠. 결국 제약바이오 업계의 자발적인 자정 노력이 절실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