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시장의 '공급난 장기화'를 예고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중심으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생산능력 확대에는 시간이 걸리면서 당분간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23일 SK하이닉스는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향후 3년간 HBM 수요는 당사 공급능력을 상회하는 수준"이라며 "고객들이 가격보다 물량 확보를 우선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호적인 가격 환경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메모리 시장이 과거와는 다른 흐름에 들어섰다는 점도 재차 강조했다. 회사는 이번 가격 상승을 단기적인 수급 문제라기보다 시장 구조가 바뀐 결과로 봤다. AI 확산으로 메모리 중요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주요 고객사들이 가격보다 '물량 확보'를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공급은 쉽게 늘리기 어렵다. 업황 부진기 이후 투자가 줄어든 데다 공간 제약 및 신규 클린룸 확보 지연까지 겹치면서 단기간에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는 쉽지 않다는 판단이다.
최근 D램 현물가격의 일부 조정에 대해서도 업황이 정점을 지난 신호로는 보지 않았다. 현물 시장은 전체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유통되는 제품도 주력 사업과 성격이 달라 현물가 흐름만으로 시장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박준덕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 담당은 "급격한 가격 상승 이후 일부 유통 채널 물량이 시장에 유입되며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고 언급했다.
이번 실적은 이런 흐름을 그대로 드러낸다. SK하이닉스는 1분기 매출 52조5763억원, 영업이익 37조6103억원을 기록하며 또다시 분기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매출은 처음으로 50조원을 넘어섰고 영업이익은 직전 최대였던 지난해 4분기보다 2배 가까이 뛰었다.
HBM '품귀 사태' 현실화?
영업이익률은 72%, 순이익률은 77%에 달했다. 이익률은 엔비디아와 TSMC보다 높은 수준이다. D램과 낸드 가격 급등에 고부가 제품 비중 확대가 맞물리며 가격과 제품 믹스가 실적을 밀어 올렸다.
실제 1분기 D램은 전분기와 비슷한 수준의 출하량을 유지했으나 평균판매단가(ASP)는 60% 중반 상승했다. 낸드는 출하량이 약 10% 줄었는데도 ASP가 70% 중반 뛰었다. 물량보다 가격이 실적을 좌우한 구조다.
회사는 2분기에도 성장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고용량 서버 모듈과 모바일 수요에 대응해 D램 출하량은 전분기 대비 한 자릿수 후반 늘고 낸드는 321단 제품과 eSSD 판매 확대에 힘입어 10% 중반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AI 기술 변화도 수요 확대를 떠받치고 있다. AI는 대형 모델 학습 중심에서 실시간 추론과 에이전트형 AI 단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단순 질의응답을 넘어 계획·실행·검증을 반복하는 구조로 진화,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HBM뿐 아니라 서버용 D램·엔터프라이즈 SSD 등 시스템 전반에서 필요한 메모리 총량도 함께 늘고 있다.
메모리 효율화 기술이 오히려 수요를 키운다는 점도 강조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데이터 처리 방식을 개선해 메모리를 덜 쓰는 기술이 확산되면서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메모리를 덜 쓰는 방향이 아니라 같은 용량으로 더 많은 작업을 처리해 AI 서비스 규모를 키우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더 긴 문맥과 더 많은 동시 추론을 처리하게 되면서 전체 메모리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차세대 제품 로드맵도 보다 구체화했다. SK하이닉스는 HBM4의 개선 제품인 HBM4E를 하반기 샘플 공급, 내년 양산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고객사와 출하 일정과 사양을 긴밀히 조율 중이며 베이스다이는 고객 요구 성능에 맞춘 최적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코어다이에는 10나노급 6세대(1c) 공정이 적용된다. 회사는 해당 공정이 이미 양산과 수율 측면에서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캐파 싸움 본격화…투자 속도전
SK하이닉스는 HBM 사업의 경쟁력을 성능과 전력 효율뿐 아니라 수율·품질·공급 안정성·고객 신뢰까지 포함한 '종합 실행력'으로 봤다. 제한된 생산능력 안에서도 HBM과 일반 D램을 균형 있게 배분해 AI 생태계 전반의 성장을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장기공급계약(LTA) 확대 가능성도 확인됐다. 공급 부족이 길어지면서 고객들의 중장기 물량 확보 요구가 크게 늘었다는 설명이다. 과거처럼 단순 가격 중심 계약이 아니라 공급 안정성과 수요 가시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로 바뀌는 흐름이다.
박준덕 담당은 "고객에게는 공급 안정성을, 당사에는 수요 가시성과 안정적 수익 구조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다양한 방식의 LTA를 검토 중"이라며 "정착될 경우 투자 효율성과 산업 전반의 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HBM 이후를 겨냥한 차세대 메모리 준비도 병행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92GB SOCAMM2를 이달부터 양산하기 시작, 차세대 CXL 메모리와 AI 워크로드 특화 스토리지 기술도 함께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CXL 3.0 기반 2세대 제품과 차세대 고대역폭 스토리지 기술 등 신규 시장을 겨냥한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HBM으로 확보한 리더십을 D램과 낸드 전반의 차세대 제품으로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투자도 공격적으로 확대한다. 올해 설비투자(CAPEX)는 전년 대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청주 M15X 램프업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인프라 구축, EUV 장비 확보 등이 핵심이다. 특히 용인 클러스터 1기 팹의 클린룸 가동 시점을 3개월 앞당겼다. 용인 클러스터는 중장기 운영의 핵심 생산기지가 될 예정이며 페이즈1에서는 D램을 생산한다. 이후 페이즈2~6의 제품과 공정은 시장 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경쟁사들의 투자 확대에도 공급 과잉 우려는 제한적이라고 봤다. 고객과 공급사 모두 장기 수요·공급 가시성 확보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무 전략은 '재투자와 환원 병행'으로 요약됐다. AI 시대 구조적 성장 국면에서는 창출된 현금을 사업에 재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동시에 주주환원도 강화한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과거와 같은 공급 과잉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재무 건전성과 주주환원 확대를 병행할 수 있고 자사주 매입·소각 등 추가 방안을 연내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동 리스크에 따른 원자재·에너지 수급 우려에 대해서는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헬륨·브롬 등 주요 공업가스는 공급사 다변화를 마쳤고 재고도 충분히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텅스텐 역시 가격 상승은 있지만 생산 차질은 없고 LNG도 장기계약으로 확보해 에너지 가격 변동이 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SK하이닉스는 ADR 상장도 추진 중이다. 회사는 지난 3월 24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ADR 상장 공모 관련 등록 신청서를 비공개 제출, 연내 미국 증시 상장을 목표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공모 규모·방식·일정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SEC 심사와 시장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