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비 문화가 '소유'에서 '사용'으로 변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정수기에서 시작된 렌탈시장은 최근 침대 매트리스, 타이어, 그림, 장난감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 렌탈시장 성장률은 10%대에 이른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렌탈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상 깊숙이 파고 들고 있는 렌탈시장에 대해 알아봤다. [편집자]
서울 소동동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1층에 자리잡은 '살롱 드 샬롯'. 백화점 문화센터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이 매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백화점에 자리잡은 렌탈전문숍이다. 여성드레스와 남성정장, 핸드백, 선글라스, 시계까지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빌려준다. 원래는 귀금속 매장이 있던 곳인데 지난 7월 렌탈전문숍에 자리를 내줬다.
지난 25일 오후 이곳을 찾았을 땐 태국에서 온 외국인 부부가 아이에게 입힐 드레스를 둘러보고 있었다. 외국인이라도 국내에서 발급한 신용카드가 있으면 이곳에서 옷을 빌리거나 구매할 수 있다. 인근 호텔에 숙박하는 외국인들이 종종 찾는다고 한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국내와 달리 해외에선 렌탈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아 비즈니스 행사 때 필요한 정장을 빌려가는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다"고 전했다.
◇ 예상 웃도는 성장세
국내에서도 최근 몇년새 렌탈시장은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3년전 국내 렌탈시장 규모를 추정한 보고서(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진화하는 렌탈 트렌드, 2013년 1월)를 냈는데 그때 내놓은 2016년 렌탈시장 규모(전망치)가 25조9000억원이다. 현재 여러 언론사와 증권사가 국내 렌탈시장 규모로 소개하고 있는 그 수치다.
당시 연구소는 국내 개인·가구용품(자동차·산업기계·장비 제외) 렌탈시장은 연평균 5.7%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실제 성장세는 이를 웃돌 것으로 보인다. 최근 3년간 주요 렌탈업체의 매출성장률은 코웨이 4%, 바디프랜드 50%, 쿠쿠전자 23%, 하츠 40% 등으로 보고서 기준보다 대체로 높은 추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렌탈협회 관계자도 "현재 정확한 규모는 파악이 어렵지만 렌탈시장 자체는 꾸준히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협회는 국내 렌탈시장에 2만개 업체, 15만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가벼운 소비'에 눈뜨다
특히 남이 쓴 물건은 쓰지 않고, 소유 그 자체에 가치를 뒀던 기성세대와 달리 필요한 기간만 사용하는 것에 익숙한 20~30대 젊은층이 렌탈시장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들은 가볍게 사고 가볍게 버리는 유니클로와 자라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를 선호하고, 꼭 필요하다면 중고제품도 마다하지 않는다. 옷 한벌을 사서 몇년을 입고 다니는 부모세대와는 다르다.
중고나라가 1500만명 가까운 회원을 보유한 국내 최대 직거래장터로 성장한 것도 20~30대의 열린 마인드가 큰 힘이 됐다. 지난 3월 현재 중고나라 이용자의 약 70%가 20~30대로 구성돼있다.
황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2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렌탈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 세대의 소비방식은 더 잘 즐기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더 나은 소비 방법"이라며 "이들 세대에게 소유란 영구적으로 무언가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기간 동안만 갖는 것이 되고 있다. 젊은세대에게 소유라는 개념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 특별한 날 위해서라면
롯데백화점도 이 같은 소비트렌드의 변화에 주목했다. 살롱 드 샬롯에선 시중에서 800만원대에 거래되는 명품백을 40만원 정도에 2박3일을 빌려준다. 동창회와 친구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을 앞두고 주로 젊은층이 찾는다고 한다. 수작업으로 제작한 남성정장과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넥타이 등 평소엔 엄두도 내기 힘든 고가의 상품도 렌탈상품으로 내놨다.
해외에서는 이미 패션 렌탈이 급신장 중이다. 미국에서 정장이나 드레스, 액세서리 등을 빌려주는 회사인 '렌트 더 런웨이(Rent the Runway)'는 설립 7년만에 500만명 이상의 회원을 모았다. 포브스에 따르면 현재 이 회사의 기업가치는 6000억원대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에어클로짓(Air Closet)'도 2014년 말 오픈 이후 1년만에 가입 회원이 7만명을 돌파하는 등 빠르게 입지를 넓히는 중이다.
▲ 롯데백화점이 지난달 문을 연 렌탈전문숍 '살롱 드 샬롯'. |
빌려쓰는 것을 꺼리지 않는 소비문화에 주목한 기업들은 발빠르게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1조원을 들여 KT렌탈(현 롯데렌탈)을 인수했고, 현대백화점그룹은 아예 정수기와 비데 등을 렌탈해주는 전문회사(현대렌탈케어)를 차렸다.
최근 CJ그룹과 SK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 대기업들이 동양매직 인수경쟁에 뛰어든 것도 렌탈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그만큼 높게 봤기 때문이다. 가스레인지와 식기세척기 등을 제조·렌탈하는 동양매직은 지난해 역대 최대인 39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모기업인 동양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사모펀드에 매각된 2013년 3000억원에 못미치던 매출이 렌탈 사업 덕분에 날개를 단 것이다.
◇ 렌탈을 주목한 기업들..실패도
그렇다고 렌탈산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단정짓기는 이르다. 이마트는 2013년 가전렌탈 사업에 손을 댔다가 1년만에 사업을 접었다. 고가의 렌탈료와 위약금 부담으로 소비자들의 반응이 급격히 식었기 때문이다. 풀무원 계열의 청소용품 렌탈업체인 풀무원더스킨은 2012년 설립 이후 계속 적자를 보고 있다.
올해 반기기준으로 역대 최대의 매출을 올린 롯데렌탈도 순수하게 차량렌탈로 올린 매출보다 중고차를 되팔아 거둔 매출이 더 큰 폭 성장했다. 롯데렌탈은 올해 상반기 575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이 가운데 201억원이 중고차 판매로 거둔 이익(중고차 판매수익-중고차 판매원가)이다. 렌탈시장보다 중고차 시세에 더 민감한 사업구조가 됐다는 의미다. <시리즈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