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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人워치]매일 죽쑤는 여자

  • 2019.04.29(월) 15:57

정경희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 수석연구원 인터뷰
'비비고 죽' 경쟁력은 '쌀'…전국 죽 맛집의 맛 담아
소비자들에 큰 인기…출시 4개월만 700만개 판매

사실 '죽(粥)'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죽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우선 쉽게 배가 고프다. 햄버거조차 간식이라고 굳게 믿는 내게 죽은 성에 차지 않는다. 밥의 서브 메뉴일 뿐 절대로 밥의 대체재로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죽은 죽일 뿐 밥일 수 없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또 하나, 죽은 아플 때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몸이 아파 밥을 먹을 수 없을 때, 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라도 곡기(穀氣)를 채워야 할 때 먹는 음식이다. 어린 시절 몸이 아파 밥을 넘길 수 없을 때 어머니가 쑤어주시던 녹두죽-어머니는 무척 비싼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셨다-이나 흰죽이 떠오른다.

그 밍밍한 흰죽을 삼키고 있노라면 아픈 현실이 더욱 실감났다. 깔깔한 입안에 욱여넣는 흰죽과 간을 맞추기 위해 뿌린 간장의 조합은 아픈 몸과 별개로 심리적으로 나를 더욱 위축시켰다. 그래서 난 죽을 좋아하지 않는다. 죽은 곧 아픔이자 어쩔 수 없을 때 먹어야 하는, 속을 달랠 간식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죽이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아플 때 먹는, 간식에 불과한 음식인데 왜 그리 열광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죽에 무엇을 넣었길래 판매 그래프가 쑥쑥 우상향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궁금하면 찾아보는 것이 순서. 그 비밀을 들려줄 주인공을 찾아 수원으로 달렸다.

정경희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 수석연구원(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지난 25일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CJ제일제당의 '비비고 죽' 개발자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수원 광교에 있는 CJ블로썸 파크를 찾았다. 마침 내리던 봄비를 뚫고 가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웬만해선 인터뷰 시간에 늦지 않는 편이다. 귀한 시간을 내주는 인터뷰이에게 예의가 아니어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가는 내내 속이 탔다.

허겁지겁 CJ블로썸 파크 로비에 도착하자 인터뷰의 주인공인 정경희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 수석연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라며 수줍게 웃었다.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조용한 목소리에 수줍은 미소만을 짓던 그가 CJ제일제당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쌀 전문가이자, 달변가(達辯家)인 줄은.

대체로 인터뷰이의 첫인상을 보면 그날 인터뷰의 성패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첫 만남부터 수줍어하고 목소리가 작은 경우 십중팔구 인터뷰가 난항을 겪기 마련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의외로 이런 인터뷰이들이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면 목소리는 작지만 내용은 거침없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공통점은 인터뷰이가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해당 사업을 성공시킨 경우다. 이번이 그랬다.

정 연구원은 2011년 CJ제일제당에 입사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자신의 전공을 잘 살린 케이스다. 요즘 그는 무척 바쁘다. 작년 11월 론칭한 '비비고 죽'이 큰 인기를 얻고 있어서다. 여기에다 오는 6월 신제품 출시를 계획하고 있어 후속 제품을 기획하고 테스트하느라 짬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게 내준 시간인데 인터뷰에 늦었으니 죄책감이 더 밀려들었다.

정 연구원은 "'비비고 죽'을 론칭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반응이 좋아서 기쁘다"라며 "소비자들이 '비비고 죽'을 드시고 죽집에서 먹은 것 같다거나 마트 시식 코너에서 너무 맛있다는 반응을 들을 때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밝혔다.

이어 "제일 기뻤던 것은 결혼한 친구들이 '안밥모(밥 안 먹는 아이를 둔 엄마들 모임)'라는 카페에 '비비고 죽'이 올라왔는데 평소 밥을 잘 안 먹던 아이가 이것은 먹더라는 반응이 많다고 알려줬을 때"라고 소개했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으면 부모의 속은 타들어 간다. '또래 아이들보다 작으면 어쩌지?'. '무슨 병이 있는 걸까?' 등 노심초사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그 마음을 잘 안다. 그런 고민을 해결했으니 뿌듯할 만도 하다.

현재 CJ제일제당의 '비비고 죽'은 국내 죽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작년 11월 첫 출시 이후 지난 3월 말 기준 약 700만 개를 판매했다. 누적 매출은 180억원을 넘어섰다. 월 매출은 평균 35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식품업계에서 월 매출 10억원 이상이면 소위 '대박 상품'으로 통한다. 닐슨 코리아에 따르면 점유율도 작년 12월 단숨에 20%를 넘어섰다. '비비고 죽'은 이미 대박 상품 반열에 올라있었다.

CJ제일제당은 국내 죽 시장에서 후발주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CJ제일제당은 지난 2003년 상품 죽을 선보인 바 있다. 흰쌀죽을 베이스로 한 짜먹는 죽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결국 2013년 죽 사업을 접는다. 그 사이 경쟁사들이 국내 죽 시장을 장악했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죽'이 후발주자로 오해받는 이유다.

그는 "2013년 단종 이후에도 사실 죽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왔다"면서 "기초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여러 번 기회를 엿봤지만 실제 출시라인까지 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존 제품에서 벗어나 내실을 강화하고 기본에 충실한 죽을 한 번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게 '비비고 죽'의 출발"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죽에 대한 선입견이 강했던 내게 이 설명만으로는 '비비고 죽'과 여타 죽제품과의 차별점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물었다. 도대체 '비비고 죽'이 다른 죽제품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그러자 정 연구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사실 입사하고 죽 연구도 많이 했지만 가장 많이 했던 것은 '햇반'이었다"고 했다. 그랬다. 그는 '쌀 전문가'였다. 죽의 가장 기본은 쌀이다. 쌀 전문가가 죽을 연구했으니 '비비고 죽'의 품질이 좋을 수밖에.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정 연구원은 "햇반을 연구하면서 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라며 "죽도 쌀에 따라 맛이 다를 테니 어떤 쌀을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쌀 구매부터 수확 이후 관리, 건조 온도, 시간 등은 물론 관리 장소까지 고려했다. 지금 '비비고 죽'에 사용하는 쌀은 햇반을 생산하는 부산공장에서 이런 엄격한 관리를 거쳤으며, '비비고 죽' 용도로 따로 도정한 것만 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죽을 보면 고형물의 크기, 모양이 다 다르다. 죽에 다른 원물을 다 테스트해보고 사이즈와 식감 등을 모두 고려해 차별화했다. 씹히는 느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 이를 적용했다"라고 말했다. CJ제일제당은 '비비고 죽'에 대해 "원물 그대로의 맛과 식감을 가졌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CJ제일제당이 이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맛은 어떻게 잡았을지가 궁금했다. 그러자 정 연구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비비고 죽'을 만들면서 전국 유명한 죽집은 모두 다녔다"며 "약 4개월간 30군데 정도의 죽집을 다니며 일일이 모두 맛을 봤다. 하루를 죽으로 시작해 죽으로 끝냈다. 하루에 여섯 군데를 돌며 죽만 먹은 적도 있다"라고 밝혔다.

정 연구원은 "죽을 먹으면서 소비자들은 왜 상품 죽이 아니라 죽 전문점에서 죽을 사 먹는지에 대해 고민했다"면서 "그 결과 죽 전문점들에선 자연스럽고 엄마가 끓여줬을 것 같은 느낌을 구현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런 점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죽 맛집의 맛을 가져와 지금의 '비비고 죽'을 만들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물었다. 인터뷰의 단골 질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서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때로는 몰랐던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눈을 반짝였다. 그는 "'비비고 죽'을 생산하면서 공장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어서 시행착오가 많았다"라며 "채소를 볶더라도 어떻게 볶아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모두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공장에서 특히 힘들어했다"라고 답했다.

기대했던 숨은 뒷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비비고 죽' 개발 과정이 녹록지 않았음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사실 식품업체에서 신제품을 기획, 개발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그렇게 출시한 제품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개발자 입장에서 그간의 어려움은 모두 좋은 추억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제품은 시장에 나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정 연구원은 성공한 케이스다.

그는 "'비비고 죽'에 대한 기초연구를 진행할 때 시장에서도 이런 제품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국내 죽 시장이 계속 성장하고 있었고 상품 죽이나 죽 전문점들도 늘고 있었다. '비비고 죽'을 내놓으면서 죽 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성장할지는 몰랐다"라고 밝혔다.

인터뷰 내내 정 연구원은 조용하지만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때로는 강경한 어조보다는 이렇게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상대방의 귀를 더 잡아끈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을 물었다. 정 연구원은 '전복죽'이라고 했다. 오늘 퇴근길엔 마트에 들러 '비비고 전복죽'을 하나 사볼까 싶다. 그의 말처럼 정말 밥알이 살아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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