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따로 없었다. 금요일 퇴근길은 지옥으로 가는 특급열차를 타는 기분이었다. 반면 일요일 밤은 너무 설렜다. 다음 날 출근할 수 있어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충전해 주말에 방전하는 시스템은 몇 년간 이어졌다. 그렇다. 육아 이야기다.
나는 두 아이의 아빠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크게 손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슬슬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아내는 그것이 그렇게 서운하다고 토로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엄마 아빠를 찾더니…"라며 섭섭해한다. 그럴 때마다 "남자 애들은 다 그렇게 커"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맞벌이 부부였다. 모든 맞벌이 부부가 그렇겠지만 우리 부부도 정말 육아에 최선을 다했다. 아내에게만 육아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집안일과 육아를 최대한 같이하려 했다. 일의 구분은 없었다. 조금이라 손이 비는 사람이 먼저했다.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다 지쳐 아이를 내려놓고 대성통곡을 한 적도 많았다.
그래도 한계는 분명했다. 아무리 육아와 가사를 같이 해도 아내에게 떨어지는 하중이 더 많았다. 아내는 나날이 힘들어했고 그 힘듦은 결국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잉태했다. 나는 벌어야 했고 아내는 키워야 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저녁약속을 최소화해도 내가 저녁 약속에 가있는 동안 아내는 철저히 혼자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다. 이기심이었다.
아내는 출산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했다. 진짜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 그 시간과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매주 일요일에는 다음 주 약속을 공유했다. 약속이 겹치는 날에는 무조건 내 약속을 연기했다. 아이를 봐주시는 이모님 퇴근 시간에 늦을까 전전긍긍하며 둘 중 하나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뛰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부족했다.
아내는 결국 육아휴직을 결정했다. 법으로 정해진 1년의 육아휴직이었지만 그마저도 눈치를 보느라 쓸 수 없었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육아휴직에 들어갔고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 아이 곁에 있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적인 부분을 포기하고 아이를 택했다. 수입이 반으로 줄었다. 힘들었다. 대신 아이들의 안정과 웃음을 얻었다. 유일한 위안이다.
후배들이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독박육아를 맡아야 하는 그 상황이 낯설지 않다. 아빠는 아빠대로 밖에서 일하랴,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 걱정하랴 정신이 없다. 엄마는 엄마대로 독박육아에 지쳐간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의 상황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몸이 너무 힘들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쏟아낸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출산 후 독박육아로 고통받고 있는 아내들 곁에 남편이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 경험상 그렇다. 유독 여성에게만 육아의 무게가 가혹하게 지워지는 대한민국의 환경을 생각하면 아빠의 동행은 더욱 큰 힘이 될 터. 그래서일까. 롯데그룹이 지난 2017년부터 도입한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사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홍보성 이벤트로 여겼다. 이런 이벤트는 대부분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롯데그룹의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여기저기서 롯데의 남성 육아휴직에 대한 이야기가 적잖게 들렸다. 그래도 믿지 않았다. '누굴 속이려고!'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롯데의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재 그 제도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유제훈 롯데건설 인사부문 책임이다. 사실 인터뷰이 섭외가 쉽지 않았다. 이왕이면 본인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나의 고집 때문이었다. 내 집에 낯선 사람을 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마음 십분 이해한다.
어렵사리 인터뷰이를 섭외했다는 소식에 유 책임의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지난 7일 마침내 그를 만났다. "어서 오세요"라며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첫인상은 딱 아이 키우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편한 복장에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사실 대부분 인터뷰이들은 인터뷰 자리에 나올 때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사진 때문이다. 하지만 유 책임은 그렇지 않았다. 허를 찔렸다.
실례를 무릅쓰고 현관에 들어서자 전형적인 아이 키우는 집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 책임의 아내는 이제 갓 100일이 지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인터뷰 때문에 집안을 정리한 흔적이 보였다. 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예전 내가 아이를 키울 때 우리 집 모습 그대로였다. 곳곳에 아이를 위한 쿠션과 젖병 등이 놓여있었다. '그때 우리 집도 그랬지'라는 생각에 잠시나마 추억에 젖었다.
유 책임은 2008년 롯데건설에 입사했다. 올해로 11년차다. 롯데건설 인사부문 복지팀에서 근무한다. 지난달 17일부터 한 달간 육아휴직에 들어갔다.(그는 인터뷰 후인 지난 17일 회사에 복귀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내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아이를 키워왔던 과정과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유 책임도 두 아이의 아빠다. 첫째 아이는 여섯 살이다. 유치원 종일반에 다니는 터라 만날 수는 없었다. 이번 육아휴직은 둘째 때문에 썼다. 그는 "회사에서 중간 관리자이다 보니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며 "그래서 이번 육아휴직를 사용하는데 많이 주저했다"고 했다. 나 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이 때문에 주어진 휴가도, 제도도 활용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아빠다.
유 책임은 "부서에 인력 충원도 없는 상황에 나마저 육아휴직으로 빠지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라면서 "실제로 육아휴직을 쓴 지 1, 2주 뒤까지 회사에서 전화가 오곤 했다. 처음에는 아이 보는 것이 힘들어 주말에 다시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라고 털어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같은 처지였더라도 그랬으리라.
처음 육아휴직을 결정했을 때 회사에서 혹시라도 눈치를 주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 책임은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했을 정도다. 회사에선 당연히 가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3월에 바쁜 일이 있어 4월에 쓰게 됐는데 담당 임원이나 팀장 모두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오히려 윗분들은 너는 반드시 가라고까지 했다"라고 전했다.
아울러 "회사에선 이제 육아휴직 대상임에도 육아휴직을 쓰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라며 "그룹에서도 독려하는데다, 육아휴직을 쓴다고 해서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는 일도 없는데 왜 안갈까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라고 설명했다.
육아휴직에 돌입한 이후 유 책임의 하루 일과가 궁금했다. 그는 "주로 첫째를 전담한다"면서 "7시 30분에 기상해 8시 20분까지 첫째를 준비시켜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이후엔 집에서 설거지와 빨래 등을 하고 둘째와 논다. 그러다가 아내와 함께 근처 마트에 다녀오는 등 같이 시간을 보낸다. 4시 30분에 첫째가 귀가하면 와이프가 저녁 준비를 할 동안 아이들을 챙긴다. 그리고 9시에 첫째를 재우고 이후에는 둘째와 보낸다"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참 빡빡한 일과다. 하지만 그 일과 사이사이에는 아빠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 아내에 대한 배려가 짙게 묻어있었다. 유 책임은 "예전 휴가 때는 쉬기 바빴다"면서 "내내 자거나 소파에 누워 TV를 보거나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첫째는 첫 애다 보니 이런저런 신경을 많이 썼다. 반면 둘째는 일이 바빠 많이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둘째에 대한 정이 없었다. 지금은 너무 예쁘다"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유 책임의 육아휴직을 가장 반긴 사람은 아내일 터. 아내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는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에 소홀해지는 면이 많은데 남편이 곁에 있어 그런 걱정이 없다. 첫째를 심리적으로 돌봐주다 보니 첫째도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라고 설명했다. 또 "육아에 있어서도 남편이 있으니 안정적이다. 아기를 키울 때 바쁘면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데 남편이 곁에 있어 많이 의지가 된다"라며 웃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아쉬운 점은 분명 있으리라. 유 책임에게 슬쩍 물었다. 주저하던 그는 "솔직히 말하면 기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라며 "금전적인 부분만 해결된다면 이런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싶다"라고 말했다. 유 책임의 아내도 "벌써 육아휴직이 끝나간다니 서운하다"면서 "유급만 된다면 1년 정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유 책임도 그의 아내도 남성육아휴직 제도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현재 롯데그룹은 남성 육아휴직자에게 휴직 첫 달은 통상임금의 100%를 보전(정부보조금에 모자란 금액 제공)해준다. 사용 기간은 최소 한 달이다. 외벌이의 경우 아내가 출산 후 3개월 이내, 맞벌이는 2년 안에 반드시 사용토록 하고 있다. 그룹에선 각 계열사들의 남성 육아휴직 제도 사용 여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유 책임은 "앞으로 회사에 복귀하면 후배들에게 남성 육아휴직 제도를 적극 추천할 생각"이라며 "나처럼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많아서 이 제도를 쓰기를 주저하는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더욱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런 기회를 준 회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복귀하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유 책임은 소파에, 그의 아내는 곁에 서 있었다. 순둥이인 둘째는 인터뷰 도중 잠이 들었다. 자면서 꿈을 꾸는지 배실배실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 책임 부부의 눈엔 아이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났다. 만일 그가 회사에 대한 책임감에 밀려 남성 육아휴직 제도를 사용하지 못했다면 아이의 웃는 모습을 그렇게 쳐다볼 수 있었을까.
집을 나서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고와서다. 유 책임의 사람 좋은 웃음과 그 곁에서 이를 바라보는 아내의 행복한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 책임의 가족들은 육아휴직 종료를 앞두고 속초 여행을 계획해뒀다고 했다. 지금쯤이면 좋은 추억을 쌓고 복귀했을듯싶다. 그에게 지난 한 달은 아마도 인생 최고의 행복 충전기간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집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닐 것이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