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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롯데 '비상경영'에 숨겨진 의미

  • 2019.11.15(금) 16:22

지난달 경영간담회서 처음 언급…예산·투자 등 질책
BU에서 지주로 무게추 이동…신동빈 체제 강화 포석

롯데그룹이 최근 비상경영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통상 기업들이 비상경영 체제를 선언할 때는 실적이 매우 좋지 않거나 위기에 빠졌다고 판단할 때입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기업 운영 전반을 타이트하게 가져가곤 합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는 것을 말합니다.

롯데그룹도 위기에 봉착했다고 판단한 것일까요? 사실 처음 롯데그룹의 비상경영 체제 전환 소식을 들었을 때 의아했습니다. 롯데그룹을 둘러싸고 있는 경영 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할 만큼 어렵다고는 여겨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롯데그룹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통 부문은 어렵습니다.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른 화학 부문도 예전만 못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롯데그룹 전체가 휘청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계열사들의 실적이 예전만 못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비상경영 체제를 고려해야 할 만큼 위기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생각입니다. 최근에는 롯데그룹이 가장 걱정했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대체로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럼에도 롯데그룹은 왜 비상경영 체제 전환을 선언한 것일까요.

롯데그룹의 비상경영 체제 전환 선언은 지난달 30일 열린 경영간담회에서 나왔습니다. 롯데의 경영간담회는 신 회장을 비롯해 롯데지주 및 각 계열사 대표와 임원들이 참석합니다. 롯데그룹을 둘러싼 각 분야의 경영 환경과 이슈들을 공유하는 자리로 매년 열립니다. 이 자리에서 롯데그룹의 경영진들은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비상경영 체제로의 전환은 이 자리에서 언급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입니다. 신 회장의 최측근입니다. 황 부회장은 이날 경영간담회의 본세션이 시작되기 전 각 계열사 대표들과 임원들에게 비상경영 체제 전환을 요청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신 회장도 있었습니다. 신 회장은 황 부회장의 발언을 듣고 있었습니다. 선언은 황 부회장이 했지만 사실 신 회장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황 부회장이 비상경영 체제 전환을 요청하면서 했던 발언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롯데가 왜 비상경영 체제 카드를 빼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황 부회장은 "투자의 적절성을 철저히 분석해 집행하고 예산관리를 강화해 임직원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면서 “향후 발생 가능한 외환 및 유동성 위기에도 철저해 대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장밋빛 계획이나 회사 내외부의 환경만 의식한 보수적인 계획 수립은 지양해달라"면서 “명확하고 도전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혁신을 통해 이를 반드시 달성해달라”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를 위해 “기간별로 철저한 피드백을 통해 탄력적 경영을 해달라"라고도 언급했습니다. 얼핏 보면 비상경영 체제로의 전환을 요청하는 이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투자의 적절성을 철저히 분석해 집행하고 예산관리를 강화해 임직원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라는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당부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질책의 성격이 강합니다. 핵심은 그동안 각 계열사별로 투자와 예산집행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장밋빛 계획이나 회사 내외부의 환경만 의식한 보수적인 계획 수립'이란 대목입니다. 이는 각 계열사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업 계획을 수립해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풀이됩니다. 마지막으로 '기간별 철저한 피드백을 통한 탄력 경영' 주문도 눈에 들어옵니다.

황 부회장의 이 같은 지적은 전반적으로 롯데그룹 전 계열사 대표와 임원들에 대한 질타의 성격이 강해 보입니다. 롯데그룹은 지난 2017년 각 사업별로 BU(Business Unit)를 도입합니다. 이에 따라 롯데그룹은 크게 유통, 화학, 식품, 호텔·서비스BU로 나눠 각 BU장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사업부별로 수평적인 조직 체계를 갖춰 시너지를 내겠다는 복안이었죠.

사실 롯데가 BU제도를 도입한 것은 당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등에 연루돼 향후 거취가 어찌 될지 몰랐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만일 오너가 부재할 경우 각 사업부별로 원활한 사업 진행을 위한 사전 장치의 일환인 셈입니다. 아울러 롯데는 BU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이를 컨트롤할 지주사 설립에 박차를 가해 왔습니다.

롯데의 BU 체제는 외형상으로는 무척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부분에서 삐걱댔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업 추진 시 각 계열사와 BU 간, BU 내 계열사 간 의견 조율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들이 적잖게 들려왔습니다. 더불어 당초 기대했던 BU 체제에서 실적 향상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롯데그룹 내부 일각에서 BU 체제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BU 체제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사이 신 회장이 적극 추진했던 지주사 체제는 거의 완성됐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롯데그룹은 사실상 롯데지주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향후 호텔롯데를 상장하고 이를 롯데지주와 합병하게 되면 롯데그룹의 지주사 체제는 완성됩니다. 이는 신 회장의 오랜 숙원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황 부회장의 비상경영 체제 전환 선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은 신 회장의 거취가 불안정했지만 이제는 그 불확실성이 제거됐습니다. 또 지주사 체제도 골격을 갖췄습니다. 이런 불안 요소들이 없어진 만큼 그동안 각 BU에게 맡겼던 투자, 예산집행, 사업 계획 수립 등에 대한 권한을 롯데지주가 다시 가져오겠다는 선언이 아니냐는 분석입니다.

실제로 이번 경영간담회에서 신 회장은 종전과 달리 각 계열사 대표 및 임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주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이 경영간담회 참석자들의 전언입니다. 이는 신 회장이 그룹 전반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함과 동시에 확실히 주도권을 쥐고 공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시그널로 풀이됩니다.

업계 관계자는 "신 회장은 그동안 각종 재판 등으로 향후 자신의 거취가 불안했던 탓에 그룹 경영 전반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없었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불안 요소들이 정리된 만큼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겠다는 신호가 아니겠느냐"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도 "최근 업계에 롯데의 연말 인사폭이 무척 클 것이라는 소문이 자주 들린다.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롯데그룹은 최근 주요 계열사의 합병, 매각 등을 통해 효율화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은 쳐내고 핵심은 취하는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신 회장이 본격적으로 롯데그룹을 직접 컨트롤하기 위한 준비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 회장이 전면에 나서 핸들을 잡은 롯데그룹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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