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그룹이 화장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패션 전문 계열사인 한섬을 통해 자체 화장품 브랜드 '오에라(oera)'를 출시했는데요. 패션 전문 기업인 한섬이 다른 사업에 뛰어든 것은 설립 이후 처음입니다. 게다가 현대백화점그룹은 경쟁업체들이 이커머스 시장에 뛰어드는 것과 달리, 차별화에 주력했습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이번 화장품 시장 진출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사실 현대백화점그룹의 화장품 시장 진출은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한섬은 지난 2019년 3월 정관에 '화장품 제조 및 도소매업'을 추가했습니다.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지난해부터입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해 뷰티·바이오 분야에 대한 인수·합병(M&A)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한섬을 통해 지난해 5월 기능성 화장품 전문 기업 '클린젠코슈메슈티칼(현 한섬라이프앤)'을 인수했습니다. 이어 계열사 현대HCN(현 현대퓨처넷)이 천연 화장품 원료 기업 'SK바이오랜드(현 현대바이오랜드)'도 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화장품 사업 진출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한섬라이프앤은 화장품에 의약 성분을 더한 '코스메슈티컬' 전문기업입니다. 한섬라이프앤이 고기능성 화장품 개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한섬이 '프리미엄 스킨케어'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됐죠. 현대바이오랜드는 국내 1위 천연 화장품 원료 기업입니다. 천연물을 활용한 추출·발효·유기합성 등에 핵심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써 현대백화점그룹은 화장품의 유통과 기획부터 원료 공급과 생산 역량까지 갖춘 셈입니다.
그렇다면 현대백화점그룹은 왜 화장품 사업에 발을 들였을까요.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 2012년 한섬을 인수했습니다. 이후 한섬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이자 캐시카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7년 패션사업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최근 3년간 영업이익률도 평균 8%대로 동종 업계 대비 높은 수준입니다. 패션업계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4~5%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다만, 2017년 이후 한섬의 외형성장은 정체된 상태입니다. 국내 패션사업이 한계에 다다른 데다 한섬의 패션사업이 성숙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죠. 현대백화점그룹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이유입니다.
여기에 화장품 사업을 통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한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사례가 자극제가 됐습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2012년 색조 화장품 브랜드 '비디비치'를 선보인 이후 '시코르', '연작', '뽀아레' 등 자체 브랜드를 출시하며 화장품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화장품 사업은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실적 개선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장품 분야는 매출 규모에 비해 수익성이 쏠쏠한 효자 사업입니다. 지난해 신세계인터내셔날 화장품 부문의 매출액은 3293억원이었습니다. 의류 부문 매출액인 9962억원과 비교했을 때 매출 규모는 훨씬 작습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화장품 부문이 훨씬 높습니다. 지난해 화장품 부문의 영업이익은 313억원으로 의류 부문과 화장품 부문을 합한 총 영업이익(338억원)의 93%를 차지합니다. 2019년과 지난해 화장품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각각 10%, 18%에 달합니다.
이번 화장품 브랜드 론칭은 한섬에게 있어 돌파구인 셈입니다. 화장품 사업의 경우 패션 부문과 사업의 연관성이 큽니다. 그런만큼 상대적으로 시너지를 내기도 좋습니다. 한섬은 기존 프리미엄 패션 브랜드 '타임', '마인' 등을 통해 쌓아온 고품격 이미지를 화장품 사업에 접목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현대백화점그룹은 오에라에 '럭셔리 이미지'를 접목했습니다. 원료와 기술에 차별화를 뒀다는 점을 강조했죠. 회사 측은 "지난해부터 M&A를 통해 차별화한 원료와 기술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화장품 연구 기관인 스위스 화장품 연구소와 협업해 화장품을 제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패키지 역시 곡선을 살리고 스위스 빙하수의 에메랄드 색상을 적용하는 등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시세이도, 로레알그룹 등 유명 화장품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을 담당하는 미국 디자인 전문업체 '모조(MOJO)'와 손잡고 개발한 디자인입니다.
제품에 공을 들인 만큼 가격대도 높습니다. 주요 상품 가격은 20만~50만원대입니다. 가장 비싼 제품은 120만원에 달합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최상위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인 뽀아레의 최고가 크림이 72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가격입니다. 오에라를 출시함으로써 현대백화점그룹이 그간 그려온 밑그림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한섬은 현대백화점그룹의 유통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외형 확장에 나설 예정입니다. 나아가 오에라를 통해 해외 시장도 공략할 계획입니다. 한섬 측은 "올해 안으로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판교점, 더한섬하우스 부산점·광주점 등에 오에라 매장을 선보일 것"이라며 "중국 시장도 이르면 올해 안에 한섬의 중국 법인인 '한섬상해'를 통한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백화점과 면세점을 중심으로 내수 시장과 해외 시장을 모두 잡겠다는 구상입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야심은 화장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업계에서는 한섬이 이번 화장품 사업을 계기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한섬 측은 이번 오에라 론칭과 함께 "현대백화점그룹의 계열사인 현대바이오랜드와 협업해 기능성 화장품을 개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주목할 점은 현대바이오랜드가 화장품 원료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원료 의약품, 의료기기 사업도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섬이 제약바이오 분야의 다양한 사업전략을 모색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헬스케어 분야는 전망성이 좋습니다. 유통기업들이 바이오 분야 진출도 늘고 있습니다. CJ제일제당은 바이오 벤처기업 천랩을 인수하며 바이오 시장 진출을 선언했고, 신세계그룹 이마트는 지난 6월 건강기능식품 자체브랜드(PB) '바이오퍼블릭'을 출시했습니다. 게다가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올해 초 발표한 '비전 2030'에서 뷰티·헬스케어·바이오·친환경·고령친화 등의 분야를 미래 육성 사업으로 발표하기도 했죠.
현대백화점그룹은 신사업에 뛰어들어 몸집을 키우기보다는 기존 사업에 집중해 내실을 다지는 '뚝심'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산업이든 특별한 돌파구가 없으면 어느 시점에 도달한 이후 성장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오에라 론칭이 바로 그 돌파구입니다. 업계의 예상처럼 한섬이 화장품 사업을 통해 영업이익률 10%의 벽을 거뜬히 넘을 수 있을까요. 화장품 사업을 발판 삼아 바이오 사업에 뛰어들까요. 현대백화점그룹의 변신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