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형 소비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이미 수년간 이커머스에 밀려 고군분투 해왔으나 올해는 유독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고물가·고금리 탓에 소비심리가 완전히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말 특수를 노리던 상황에서 터진 비상계엄과 탄핵은 소비심리를 더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개인의 소비 여력이 줄면서 불황형 소비 트렌드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이런 불황 속에서 유일하게 성장세를 보인 오프라인 채널은 다이소다. 전 상품이 5000원 이하로 저렴해 각광받고 있다. 다이소를 '앵커 테넌트(핵심 매장)'로 유치하려는 대기업 유통업체들의 러브콜도 줄을 잇는다. 다이소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매출 3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올해는 4조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성장세를 보이던 백화점업계는 타격을 입었다. 거듭되는 가격 인상 속에서 수년간 고공성장하던 명품 시장이 불황의 직격탄을 맞으면서다. 실제로 주요 백화점업체들은 대부분 매출 성장을 이어가면서도 올 1~3분기 영업이익은 큰폭으로 줄었다.
이에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올해 유휴자산 처분과 비용 절감 등의 효율화에 매진했다. 이마트는 지난 7월 SSM 계열사 이마트에브리데이와 합병했다. 대형마트와 SSM은 비교적 비슷한 사업군이기 때문에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두 회사를 합병하면 매입 규모를 확대해 원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한편 통합 물류를 통해 운영을 효율화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마트는 지난 3월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받은 데 이어 이달 초 2차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롯데쇼핑은 점포 매각을 추진 중이다. 롯데쇼핑은 지난해와 올해 롯데백화점 미아점 주차장 부지, 롯데마트 고양중산점·양주점·영통점, 롯데슈퍼 여의점·봉선점 등을 매각, 폐점했다. 현재는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 매각도 검토 중이다.
쇼핑몰의 부상
어려운 시기인만큼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 모색도 지속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이커머스와의 차별화다. 이커머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오프라인 업체들은 '복합화'를 선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화점의 쇼핑몰화다. 올해 백화점업계에서는 신규점 출점이 없었다. 대신 대규모 리뉴얼을 통해 기존점을 쇼핑몰처럼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백화점'이라는 단어를 점포명에서 빼는 것도 트렌드가 됐다. 더현대서울, 아이파크몰처럼 복합쇼핑몰화한 점포들이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면서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9월 부산점을 리뉴얼해 '커넥트현대'로 재탄생시켰다. 백화점에 아울렛을 더한 도심형 쇼핑몰을 표방한다. 이마트와 신세계는 지난 8월 이마트 죽전점과 신세계백화점 경기점의 리뉴얼을 마치고 남부권 신세계타운을 새롭게 조성했다. 이마트 죽전점은 '스타필드 마켓'으로, 신세계백화점 경기점은 '신세계 사우스시티'로 이름도 바꿨다.
롯데쇼핑 역시 롯데백화점 수원점과 롯데몰 수원점을 통합해 '타임빌라스 수원'을 선보였다. 백화점과 쇼핑몰을 결합한 컨버전스 쇼핑몰을 콘셉트로 했다. 롯데쇼핑은 아예 이 같은 쇼핑몰 사업을 새 먹거리로 낙점하고 2030년까지 7조원을 투자해 총 13개 쇼핑몰을 운영한다는 구상이다.
대형마트는 올해 본업인 그로서리 경쟁력 강화에 계속 주력했다. 이마트는 '그로서리 상시 저가'를 지향하는 식료품 특화매장 이마트 푸드마켓 수성점을 최근 오픈했다. 롯데마트도 식료품 비중을 90%로 끌어올린 '그랑그로서리' 콘셉트 매장을 늘렸다.
또 대형마트는 불황에 맞춰 가성비 높은 델리(즉석조리식품) 코너를 강화하고 온라인에서 볼 수 없는 체험형 콘텐츠도 확충했다. 이랜드 킴스클럽은 이랜드이츠의 뷔페 '애슐리퀸즈'의 메뉴를 즉석조리식품으로 만들어 3990원에 판매하는 '애슐리 바이 델리'를 도입했다. 홈플러스는 최근 강서점을 '메가푸드마켓 라이브'로 전환하면서 시식코너를 대폭 늘리고 참치, 대방어 해체쇼 등의 볼거리를 더했다.
책임 막중해진 오너
올해는 유통 대기업이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낸 때이기도 하다. 상반기 위기설의 주인공은 신세계그룹이었다. 신세계그룹 지주사 격인 이마트가 지난해 사상 첫 연간 영업손실을 내며 위기설을 부추겼다. 신세계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특히 심각했다. 또 SSG닷컴은 재무적 투자자(FI)가 투자금 회수를 위한 풋옵션을 행사하며 이마트를 흔들었다. 다행히 이마트는 본업 경쟁력을 강화하며 올해 연간 흑자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계열사 지원을 통해 신세계건설의 급한 불을 껐고, SSG닷컴은 새로운 투자자를 구해 풋옵션 리스크도 해결했다.
하반기를 뒤흔든 롯데그룹의 위기설은 한국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줬다. 온라인 상에 유포된 '롯데그룹이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의 지라시는 롯데그룹 전반의 취약점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이번 위기설의 장본인은 롯데케미칼이었지만 롯데쇼핑 등 유통업체들의 긴 부진도 문제였다.
이 때문에 대기업 오너들의 책임도 막중해졌다. 특히 올해는 각 유통 대기업의 오너들의 승진이 잇따랐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가장 먼저 신호탄을 쏜 곳은 신세계그룹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2006년 부회장에 오른지 18년만인 올 3월 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동생 정유경 신세계 회장이 지난 10월 정기 임원인사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2015년 신세계 총괄사장이 된지 9년만이다. 신세계그룹은 정용진·정유경 회장 승진과 함께 계열 분리도 공식화 했다.
정유경 회장 승진 다음날에는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이 현대홈쇼핑 회장으로 승진했다. 다만 신세계그룹과 같은 계열분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정교선 부회장은 자신이 맡아 경영 중인 현대홈쇼핑 회장이 되면서 지주사에서는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롯데그룹에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됐다. 신 부사장은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임하며 그룹 신성장동력 발굴을 진두지휘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