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임금피크제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임금피크제는 중간 관리층이 비대한 ‘항아리형 인적 구조’ 개선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반면, 인력 재배치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아 실효성 논란도 낳고 있다. 임금피크제 도입에 따른 명암을 살펴본다. [편집자]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중은행의 시내 지점엔 직원이 80명 넘게 근무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한 시중은행 임원의 말이다. 시중은행의 지점 수도, 지점에 근무하는 임직원의 수도 빠르게 줄고 있다. 은행 거래의 90% 이상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다 보니 이젠 영업점포도, 창구 인력도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그만큼 시중은행들에 인적 구조 개편과 업무 재배치는 가장 절실한 과제다. 무작정 인력을 줄일 수도 없다 보니 지금까진 희망퇴직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런데 내년 정년 연장과 맞물려 임금피크제가 최근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과 함께 실효성 논란도 여전하다. 뚜렷한 인력 재배치 청사진이 없는 데다, 정부의 압박에 따라 급작스레 도입되다 보니 전략적인 비용 절감이나 생산성 향상보다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시중은행 인적 구조 개편 최대 과제
시중은행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적 구조 개편에 나서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항아리형 인적 구조에 문제가 있다. 베이비붐 세대(1958∼1963년생) 출신이 많다 보니 중간 관리자가 비대한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사 적체가 심하고, 생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회 정무위원회 김정훈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7개 시중은행 정규직 직원 6만 6000명 가운데 1만 8000명, 28%가량이 부장과 부지점장, 팀장 등이었다.
게다가 은행 거래 패턴은 빠르게 비대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시중은행에선 인터넷과 모바일뱅킹을 비롯한 비대면 거래의 비중이 이미 90%를 넘어섰다. 그만큼 영업점포도, 여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
◇ 영업점포 폐쇄와 희망퇴직 급증
시중은행들은 그동안 영업점포 폐쇄와 함께 희망퇴직으로 이런 흐름에 대응해왔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순이자마진 하락과 함께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희망퇴직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5년 만에 대규모 희망퇴직을 시행해 1121명이 옷을 벗었다. NH농협은행도 영업점포 30여 곳을 폐쇄하면서 인력을 300명 정도 줄이는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7개 시중은행의 희망퇴직자만 2076명에 달했다. 최근 4년 사이 희망퇴직 한 5111명의 40%에 달하는 숫자다. 희망퇴직자는 2012년 798명, 2013년 661명, 2014년 1576명 등으로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은행별로는 국민은행이 1188명으로 가장 많았다. 우리은행 1049명, 신한은행 871명, 씨티은행 849명, 외환은행 477명, 하나은행 286명, SC제일은행 391명 등의 순이었다.
◇ 임금피크제 새로운 대상으로 부상
희망퇴직과 함께 최근엔 일정 연령이 되면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임금피크제가 인적 구조 개선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내년 정년 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독려하고 나선 영향이 크다.
일부 은행들은 이미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2005년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하나은행(2006년)과 외환은행(2007년), 국민은행(2008년)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지금까진 이런저런 이유로 임금피크제가 활성화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최근 국내 최대 은행인 KB국민은행이 희망퇴직과 연동한 임금피크제 개선안을 내놓으면서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NH농협은행은 현재 노사가 구체적인 임금피크제 도입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고, 신한은행 역시 노사 협의를 시작했다.
◇ 인력 재배치 청사진 없어 실효성 논란
임금피크제는 직원 입장에선 임금을 조금 덜 받더라도 정년을 채울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인력 재배치를 위한 뚜렷한 청사진과 직원들 간 공감대가 없으면 생산성 향상보다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임금피크제는 인기가 없었다. 임금피크제에 지원하면 원하지 않는 업무를 할 수밖에 없는 데다, 퇴직금도 깎이는 탓이다.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더라도 눈치만 보다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55세를 채우기도 쉽지 않다.
이미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하나은행에선 적용 대상이 한 명도 없다. 대상자 모두 스스로 옷을 벗은 탓이다. 국민은행 노사가 임금피크제 개선안에 합의하고도 관리자급 직원들을 출납업무를 비롯한 단순업무에 투입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비대면 거래 흐름에 맞춰 전반적인 인력 재배치를 위한 청사진 없이는 인적 구조 개편도 단순히 비용을 조금 줄이는 효과밖에 낼 수 없다”면서 “특히 임금피크제는 정부의 압박에 따른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