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14가지 표준 규격이 경쟁 중이다.
A: 14가지라니 말도 안 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 표준을 만들어야 해.
B: 그래!
(얼마 뒤)
상황: 15가지 표준 규격이 경쟁 중이다.
나사(NASA)의 로봇공학자 랜들 먼로가 연재하는 웹툰 'xkcd'에 나온 에피소드다. 각종 '가이드라인'과 '표준약관' 그리고 '통합서비스'를 좋아하는 우리 금융당국도 꼭 한 번쯤 되새길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수수료도 0원, 이용자도 0명'이라는 농담의 소재가 된 제로페이다.
제로페이는 결제서비스의 표준이 되겠다는 취지로 지난해 첫발걸음을 뗐다. 당시는 이미 네이버페이와 삼성페이, 페이코 등 각종 페이류가 신용카드의 아성에 맞서 힘을 키워가고 있는 시기였다.
금융당국은 이 상황을 난립으로 해석했다. 그리곤 금융회사들의 '협조'를 압박해 제로페이를 선보였다. 시중은행과 여러 결제업체들이 제각각의 결제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황에선 자영업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어렵다는 게 당국의 제로페이 출범 논리였다.
취지는 거창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제로페이는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결제서비스 중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사용 자체가 어렵다. 제로페이는 기본적으로 QR코드를 스캔해 결제가 이뤄진다. 개개인의 스마트폰에 깔려있는 기존 결제 앱에서 제로페이 기능을 찾아 들어가 카메라를 작동시킨 뒤 각 가맹점의 QR코드를 스캔하고 물건 가격을 따로 입력해줘야 결제가 끝난다.
최근 기존 신용카드처럼 포스기를 통한 결제 기능을 추가하긴 했지만 일부 편의점 등에만 해당하는 얘기여서 다른 결제수단보다 더 편리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사용자 입장에서 혜택도 크지 않다. 서울시는 제로페이를 쓰면 신용카드를 쓸 때보다 연간 47만원의 소득공제를 더 받을 수 있다고 광고한다. 하지만 이는 연봉 5000만원 이상 직장인이 소득의 절반을 제로페이로 결제할 때나 가능한 '이론적' 수치다. 할부기능이 없는 제로페이로 연간 수천만원을 결제할 수 있는 사례를 찾긴 힘들다.
제로페이의 수수료 제로정책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제로페이는 결제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금융회사들이 한시적으로 부담하는 구조다. 이런 구조는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온라인 결제가 불가능하고, 가맹점이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 집중돼 있다는 점 등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했다.
그럼에도 당국은 제로페이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잇단 무리수가 나오고 있다.
금융위는 최근 제로페이와 같은 간편결제 사업자는 가맹점에 단말기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기존 카드사나 밴 업계에 대해선 불법 리베이트로 규정하고 있는 행위다.
금융위의 결정을 접한 카드업계는 이미 간편결제 업체를 통해 단말기를 무료로 제공하는 우회로를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금융위 스스로 기존 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 셈이다.
예산도 끝없이 들어간다. 올해 상반기 중 제로페이 홍보 예산만 60억원이 잡혔으며, 이번 추경에서도 76억원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했다. 제로페이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비용 부담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실제로 제로페이가 활성화되면 공공시설 할인에 따른 수입 감소분이 서울시에서만 연간 330억원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정부가 제도적으로 또 금전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는 와중에도 제로페이는 여전히 안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제로페이 결제금액은 13억6058억원에 불과하다. 서울시 목표금액의 0.015% 수준이다. 이마저도 대부분 공무원들이 나서서 올린 실적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제로페이에 대한 사망선고는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환자는 병원에 가야 하지만 망자는 무덤에 가야하는 것이 이치다. 제로페이에 대한 평가는 이제 뒤집긴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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