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게 될 대기업 계열사들이 사실상 확정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달 초 공정거래법 시행령 입법예고를 통해 정한 적용대상은 43개 그룹 전체 계열사의 8%인 122개사에 이른다. 특히 그룹사의 풍족한 일감을 기반으로 경영권 승계의 지렛대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들이 많았던 곳들이 적지 않다. 든든한 돈줄을 틀어쥐기까지 ‘후계자’들의 동선(動線)을 따라가 봤다.[편집자]
정몽구(75)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43) 현대차 부회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영 대권(大權)’ 후계자다. 2009년 8월 기아차 사장에서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함으로써 정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지분 승계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이 또한 준비는 다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 부회장이 출자한 상당수 계열사들이 그룹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의 ‘화수분’으로 변신해 있기 때문이다.
◇ 정 부회장, 일감규제 6곳 지분소유
현대기아차그룹은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로 연결되는 두 가지 순환출자구조를 갖고 있다.
현대차 지분 5.2%만을 보유한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를 실질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도 현대차 최대주주(지분율 20.9%)인 현대모비스 지분을 7.0%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모비스 3대주주(5.7%)인 현대제철 지분을 12.5% 소유함으로써 무소불위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정의선 부회장은 그룹 지배구조의 근간이 되는 4개 계열사 중 이렇다 할만한 소유지분이 없다. 기아차 1.7%와 현대차 0.0001%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주류 계열사 지분은 변변찮지만 정 부회장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대기아차그룹에서 일감 규제 대상이 되는 계열사는 10개사다. 이 중 정 부회장이 지분을 소유한 곳이 6개사나 된다. 현대글로비스, 현대엠코, 현대오토에버, 현대위스코, 이노션, 서림개발 등으로 보유지분이 모두 20%를 넘는다.
그만큼 정 부회장에게는 향후 경영권 승계 때 활용할 수 있는 돈이 될 만한 계열사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6개사의 주식가치는 2조9430억원(상장사 시가, 비상장사 순자산가액 평가)에 달한다.
◇ 현대글로비스 지분 2조5600억원
가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은 현대글로비스다. 2001년 2월 현대기아차그룹에 그룹내 물류를 전담할 계열사가 세워졌다. 한국로지텍으로 지금의 현대글로비스다.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부자(父子)가 각각 20억원(지분율 40%), 30억원(60%)을 대서 만들었다.
현대글로비스는 사업을 위해 당시 현대·기아차의 완성차 물류를 담당했던 동서다이너스티로부터 같은 해 6월 관련 사업을 사들였고, 2년 뒤에는 범현대가인 성우그룹 계열 성우로부터 시멘트운송을 제외한 물류 부문을 인수했다.
현대글로비스는 태생적으로 그룹 내부시장(Captive Market)에 의존하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어 파죽지세로 외형이 커나갔다. 4년이 채 안돼 정 부회장에게 차익실현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분 20% 가량을 노르웨이 해운업체 빌헬름센에 매각한 것. 80.6%의 계열사 일감 덕에 9028억원(2004년 결산)의 매출을 올려 1조원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다. 정 부회장은 850억원에 달하는 차익을 남겼다.
게다가 현대글로비스는 2005년 12월 증시 상장을 계기로 정 부회장을 위해 화려한 꽃을 피웠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해 9조2700억원(개별)의 매출을 올렸다. 설립 12년만에 46배로 불어난 셈이다. 그룹사에 의존하는 매출구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국내계열사간 내부거래 비중은 35.0%, 해외계열사까지 합하면 83.9%에 달한다. 돈벌이도 나날이 좋아져 4061억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정 부회장은 현재 현대글로비스 지분 31.9%를 소유하고 있다. 2004~2011년 받은 배당금만 508억원이다. 특히 주식가치가 2조5640억원(14일 종가 21만4500원 기준)이나 된다. 대표적인 일감몰아주기 계열사란 눈총을 받고 있지만 정 부회장의 든든한 돈줄임에 틀림없다.
그룹 건설사 현대엠코도 빼놓을 수 없다. 정 부회장은 2005년 12월 현대글로비스로부터 현대엠코 지분 25.1%를 사들였다. 인수 자금은 375억원이다. 현대엠코는 지난해 매출 2조8740억원에 영업이익 1870억원을 올렸다.
이중 계열사들로부터 올린 매출이 61.2%에 이른다. 정 부회장의 현대엠코 지분가치는 순자산가치로만 따져 1480억원으로 불어난 상태다. 이외 광고대행사 이노션, 자동차부품업체 현대위스코, 부동산임대 및 축산업체 서림개발 등의 가치도 1900억원에 달한다. 이들 3개 계열사는 지난해 계열 매출비중이 40~60%대에 이른다.
◇ 말 많았던 인터넷 사업
정 부회장이 계열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재산증식에 마냥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인터넷사업에서 부침(浮沈)을 겪었다. 닷컴 붐이 일었던 2000년초 정 부회장은 인터넷 사업에 손을 댔다. 이재용(45) 삼성전자 사장이 ‘e삼성’을 설립하는 등 재계 2, 3세들이 앞다퉈 e비즈니스에 뛰어들던 때다. 정 부회장 주도로 이에이치디닷컴(e-HD.com), 오토에버닷컴이 세워진 게 이 때다.
이에이치디닷컴은 2000년 4월 현대우주항공의 위성영상사업부가 분사해 설립된 업체로 자동차의 인공위성 자동항법장치 관련 소프트웨어 및 인터넷 원격교육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닷컴 버블이 붕괴하자 정 부회장은 서둘러 지분을 정리했다. 2001년 4월 이에이치디닷컴의 출자지분 16.0%(32만주)를 19억2000만원(주당 6000원)에 현대차에 매각한 것.
이로인해 잡음이 일기도 했다. 시민단체가 그룹 계열사에 지분을 떠넘겼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급기야 공정거리위원회가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이치디닷컴은 결국 계속된 적자 누적으로 2003년말 결손금이 127억원에 이르면서 2004년 4월 현대위아에 흡수돼 자취를 감췄다.
정 부회장이 이에이치디닷컴에서 ‘쓴맛’을 봤다면, 오토에버닷컴을 전신으로 한 현대오토에버를 통해서는 ‘꿀맛’을 만끽하고 있다. 현대오토에버의 시스템통합(SI)업체로의 변신이 계기가 됐다. 정 부회장은 현재 현대오토에버 지분 20.1%를 소유하고 있다.
현대오토에버 또한 초기에는 인터넷을 통한 자동차 부품 전자상거래와 중고차 경매 사업을 벌였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2001년 매출 485억원에 순이익은 8억원에 머물렀다. 하지만 부진했던 인터넷사업을 정리하고 주력사업을 그룹 계열사들의 SI사업으로 전환하면서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현대오토에버는 지난해 8560억원의 매출과 422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2011년 매출액증가율 18.7%에 이어 지난해에는 26.6%로 뛰었다. 한마디로 그룹사들의 힘 덕분이다. 지난해 내부거래 비중은 무려 78.2%에 달한다.
현대차(2760억원), 기아차(800억원) 등은 물론 현대카드(523억원), 현대캐피탈(391억원) 등 금융 계열사들까지 나서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정 부회장의 재산증식에 일조(一助)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