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그룹이 도입한다고 밝혀 화제가 된 '○○님' 호칭은 앞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회사 직원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린다.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업무에 몰입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반대 의견도 적지 않다.
◇ 바뀐 건 호칭뿐…상명하복 여전
우선 직급 호칭을 쓰는 기업들과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사가 부하직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수평'호칭 제도를 도입하기 전이나 후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2000년대 들어 CJ를 시작으로 SK, 신세계, 롯데, 네이버 등 주요 대기업이 호칭에 변화를 줬다. 직책에 '님'을 붙이거나 매니저, 파트너 등으로 부르게 해 조직의 수평 문화를 확산하겠다는 시도였다.
그러나 기업평가 사이트 등에는 '외부적으로는 수평 문화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군대문화가 뼈저리게 존재한다' '보수적인 윗사람들 때문에 새로운 피가 말라죽는다' 등의 악평이 쏟아지는 게 현실이다.
현재 '○○님' 호칭을 시행하고 있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한미나(가명·33) 씨는 상사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설명한다. 한 씨는 "팀장이 일 시킬 때 협의 같은 건 없다"며 "업무과정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대든다고 생각하는지 상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 고개만 끄덕끄덕 한국형 인재?
대부분 대기업이 호칭 문화를 바꾸고 있지만 상명하복 문화가 여전하다는 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국내 한 기업에서 7년째 임원급으로 일하고 있는 영국인 제프리 리밍턴(가명)씨는 한국인 부하직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면 반드시 "이해했어요, 못했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는 부하직원 때문에 `뚜껑`이 열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한국인 직원들이 착실한 건 좋지만 어떨 때는 벽을 보면서 말하는 것 같다"며 "상사와 적극적으로 상의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을 가져오는 게 왜 어렵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반면 이런 직원은 국내 기업에서 인재로 통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상사와 뭔가를 의논하려고 했다간 버릇없다고 낙인 찍히기 일쑤다' '상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입을 닫고 혼자 생각하는 게 낫다'는 식이다. 소위 '까라면 까'라는 갈굼 문화에 익숙해지는 게 조직생활을 잘하는 요령이다.
◇ 조직문화 가장한 인격모독까지
이런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상사의 인격모독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 김모 검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사례는 상명하복 조직문화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김모 검사는 지난 5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기 전, 부장검사의 폭언과 폭행을 언급하며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조직이란 이런 것'이라며 후배에게 막말이나 폭행을 일삼는 상사는 검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상명하복의 폐해로 인해 한국 기업의 조직문화가 멍들고 있다는 분석은 오랜 기간 '단골'로 지적되고 있다.
올초 대한상공회의소가 내놓은 보고서에선 "기업조직이 상명하복식 업무지시, 비합리적인 평가시스템으로 인해 골병 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100개 기업 중 77개사는 글로벌 기업에 비해 조직 건강도가 하위권에 머물렀다. 상위수준으로 진단받은 기업은 23개사에 그쳤다.
◇ 권한 위임 등 업무체계 혁신해야
전문가들은 수평적인 호칭 도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소통 자체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수평적인 문화로 정평이 나 있는 한 IT기업은 직원들끼리 영어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나이나 직급에 따른 벽이 없고 의견을 말하는데 거침이 없다.
강혜련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IT 업계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수평적인 소통방식이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며 "이젠 대기업들도 시장 상황에 맞춰 최적화된 아이디어를 도출해 빠른 시간에 신상품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수평적 기업문화가 자리잡으려면 과장급 실무 담당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등 업무체계의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나 임원들이 상명하복식의 업무에 익숙하기 때문에 기업 전체가 쉽게 변하지 않는 측면도 있다"며 "부하직원들에게 명령하고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경청해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