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7월 발표된 'DOC와 춤을'이라는 노래의 한 소절이다. 당시만 해도 청바지 출근은 '상상'으로만 가능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많은 기업이 복장은 물론 회의와 업무방식, 야근, 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전근대적 직장 문화 또한 여전하다. 이제 막 직장 생활에 적응한 '김 대리들`의 고민을 들어본다. [편집자]
수년간의 해외 유학을 거쳐 이른바 '일류기업' 연구원으로 입사했던 이준희(가명·39) 씨. 그는 회사의 겉과 다른 실상에 놀랐다. 국내 유수의 제조회사로 꼽히는 이 회사에 이상한 실적 지표가 있었던 것. 이 회사에선 직원들의 야근이 길어질수록 임원의 실적이 오른다.
초과 근무시간을 수치화해, 이 점수가 높을수록 담당 상무나 연구소장이 인사 고과를 잘 받는 것이다. 제시간에 업무를 끝내는 게 효율적이라는 상식과 정반대 지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무려 14시간 가까이 회사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연구직 업무의 대다수는 자동화되어 있는 데도 임원 눈치 때문에 밤늦게까지 남아 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소설이나 야구 중계를 보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 이런 비효율적인 관행에 실망한 이 씨는 결국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이 씨의 사례처럼 불합리한 야근 관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게까지 일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야근이 길어지다 보니 일과 삶의 불균형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일부 기업에선 가정의 날, 유연근무제 등 정시 퇴근을 독려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아직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 일에 치여 회식도 못해
"보고서 글씨는 휴먼명조체 18포인트. 표는 맑은고딕 13포인트. 줄 간격은 160%. 문서 서식은 F7 누르고 상 20, 하 20, 좌 15, 우 15, 머리말 10, 꼬리말 10…" 공공기관 사원인 이수영 씨는 이 같은 문서 양식을 외우고 다닌다. 글씨체 하나만 틀려도 다시 써오라고 할 때가 잦아서다.
이런 단순 업무에 치이는 것도 야간을 늘리는 요인이다. 이 씨는 "공공기관 특성상 페이퍼워크가 중요하지만 가끔 양식을 지나치게 따진다 싶을 때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결제가 번복되면서 업무는 지연된다. 단순 오타 정도는 수정 권한을 가진 상사가 바로 고치면 되는데도 서류를 돌려보내는 식이다.
이런 모습은 외국계 회사도 비슷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기반을 둔 한 외국계 회사에 대해 직장 평가 사이트 '잡플래닛'에는 "삽질을 지양하는 효율적인 기업 문화로,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라고 올라와 있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몇 해 전 이 회사로 이직한 30대 직장인 안상원(가명) 씨는 "외국계라도 사장이 한국인이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일반 기업과 같은 군대식 문화에 본사 보고를 위한 영문 번역 업무까지 일이 두배나 많다. 일에 치여 회식 날짜를 잡지 못할 정도다.
야근 문화가 바뀌지 않자 요즘에는 퇴근을 독려하는 제도가 확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