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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직급 철옹성' 중후장대 이젠 바뀔까

  • 2020.12.30(수) 09:00

보수적인 조선·철강 등 업계, 직위 폐지 시도
과거 한차례 인사 실험은 실패…"외부서 불편"
강력한 리더십으로 조직문화 개편 추진력 필요

대우조선해양은 이달 초 사무기술직 인사체제를 기존 6단계에서 3단계로 간소화했습니다. '4을 사원'과 '4갑 사원'으로 나뉜 직위를 '사원'으로 묶고, 대리는 '선임'으로 바꾸기로 했죠. 과장·차장·부장 직위는 '책임'으로 통합했습니다. 호칭뿐만 아니라 직위도 모두 바꾼 것입니다. 지난해 연구소에 시범 적용한 뒤 이번에 사무기술직으로 확대 적용했다고 합니다.

현대중공업도 최근 인사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설계 등 엔지니어직군의 직위를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에서 엔지니어, 선임엔지니어, 책임엔니지니어로 변경했죠. 회사 관계자는 "기술과 성과를 중심에 둔 수평적이고 자율적 조직문화로 바꾸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합니다.

올해 4월에는 LS니꼬동제련이 직급 체계를 '어쏘시엇-매니저-시니어 매니저' 3단계로 줄였습니다. 이 회사가 직급체계 변경을 알리기 위해 만든 내부 웹툰을 보니 "이제는 시키는 사람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맴버로 공동 목표를 향해 가겠어요"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호칭을 바꾸는 것에서 회사가 어떤 변화를 의도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중후장대도 군대문화 버린다

기업들의 직위 파괴는 더 이상 새로운 뉴스는 아닙니다. 2000년 국내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소비재 중심의 CJ그룹이 '님' 문화를 도입한 이후 많은 기업이 직위와 호칭을 바꾸고 있죠.

하지만 상대적으로 무겁고, 두껍고, 길고, 큰 장치산업인 중후장대(重厚長大)는 굳건했습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는 새로운 바람에 몸서리를 쳤죠. 그런 중후장대 산업에서도 층층이 쌓인 직위를 단출하게 축소하고 직급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하던 호칭을 파괴하는 변화가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중후장대 산업 특유의 보수적 조직문화가 쉽게 바뀔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인사체제 개편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4년 더 과감하게 직위를 파괴했죠. 직위체제를 폐지하고 아예 팀장과 팀원으로만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인사 혁신은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사원부터 부장까지 이어지는 수직적인 인사체제가 부활했죠. 이 회사 관계자는 "조선업 특성상 외부인들과 만날 일이 많은데, 외부인들이 호칭할 때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당시 시도는 몇 년을 가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포스코도 최근 임원의 직급을 폐지했답니다. 부사장·전무·상무 등 직급을 폐지하고 본부장·실장 등 직책으로 변경했는데요. 포스코 역시 인사체계 개편 실패의 전력이 있습니다. 2011년 사원·대리·과장·차장 등 직위를 '어소시에이트·매니저·시니어 매니저' 등으로 바꿨고요, 2015년에는 전 계열사의 직급체계를 P1(신입)부터 P13(회장)까지 13단계로 통일했죠.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2017년 국내에서 대리·과장·차장 등 옛 호칭을 되살린 것이죠. 포스코 관계자는 "국내에선 직위를 폐지해도 사내에선 여전히 차장, 부장 등으로 부르게 되고 외부인들도 호칭에 불편해했다"며 "직급체계는 바꿨지만 호칭은 현실을 감안해 '국내용'으로 되돌아오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부장님'이 편한 기업조직의 한계

과거 한차례 직위 파괴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이번에 재시도하는 대우조선해양과 포스코. 이 두 회사에는 공교롭게 2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다시 과장-차장-부장 시절로 되돌아가게 된 이유입니다. 두 회사 관계자 모두 "직위를 바꿨더니 외부에서 호칭할 때 더 불편해했다"고 했죠. 수직적인 위계구조에 익숙한 우리사회부터 달라져야 기업도 변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관련기사☞[김대리의 속사정]상명하복...`님`이라 부른들

두 회사의 또 다른 공통점은 '주인 없는 회사'라는 점입니다. 경영 전문가들은 직급을 폐지하는 인사개편이 의미 있는 조직문화 개선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2~3년, 길어야 5년여 임기로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되고, 그때마다 인사정책이 바뀔 수 있다면 효과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겠죠. 

'뭐라도 바꿔보자는 식'의 제도 개편은 구성원들에게 오히려 '옛날이 좋았지'라는 복고주의만 심을 수 있습니다. 수평적 조직문화에 대한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가 없다면 조직은 원래하던 방식대로 돌아가려할 것입니다. 대우조선과 포스코의 사례는 기존의 관성을 깰 만큼 내부적으로 기업문화 개선 추진력이 확보돼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난해 직급 폐지를 시행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1년이 지난 요즘까지도 다른 부서에 전화할 때 말실수처럼 '저 ○부장인데요~' 라고 한답니다. 과장과 차장, 부장이란 직급이 없어졌지만 '부장'이라고 넌지시 드러내면 상대 부서의 일 처리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라네요. 다시 시작된 중후장대 산업의 '직급 파괴'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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