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이미 가부(可否)가 결정됐을 것이다. 애초 29일 오전 9시 서울 강남 역삼동 한 빌딩 대강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현대모비스 임시주주총회 얘기다. 만약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창업주 선조부(先祖父)의 "임자, 해봤어?" 정신으로 주총을 감행했다고 가정하면 말이다.
▲ 지난 21일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철회를 발표하기 직전,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정의선 부회장./이명근 기자 qwe123@ |
현대모비스는 이 주주총회를 불과 여드레 앞두고 취소했다. 회사를 인적분할한 후 존속법인은 현대차그룹 지배회사를 만들고 나머지를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안을 다룰 예정이었다. 아니 현대차그룹이 이 계획을 접었다. 현대차그룹은 이 분할합병을 축으로, 또 첫단추로 삼아 20년간 순환출자로 버텨온 후진적 지배구조를 뜯어고치려 했다.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더 나아가 후계자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완성을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는 밑그림도 깔고 있었다. 정 부회장은 합병 글로비스 지분을 팔아,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지만 아직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모비스 지분을 사들이려 했다.
그러나 행동주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등장, ISS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의 반대 권고가 이어지며 현대차그룹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이날 열려던 주총에서 '출석 주주 3분의 2'의 지지를 장담하기 어려운 판세가 됐다. 정 부회장은 지난 21일 "더욱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여러 의견과 평가들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지배구조 개편방안을 보완해 개선토록 할 것"이란 말을 남기고 후일을 기약했다.
만약 그가 주총을 강행했다면 어땠을까? 성공했더라도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주주 일반의 이익을 앞세우는 행동주의 펀드들은 영어권에서도 'Chaebol'이라 부르는 국내 대기업 족벌 지배구조를 공격하는 법을 잘 안다. 반대세력 결집뿐만 아니라 경영진 배임 등을 문제삼는 법정다툼에도 능하다.
3년전 삼성의 전철(前轍)만 봐도 그렇다. 삼성은 비슷한 의결권 대결 상황을 거쳐 결국 합병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청와대나 국민연금공단을 상대로 한 불법 로비,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며 결국 최고위 경영진의 구속수감까지 겪었다.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혐의 논란 역시 그때 후유증 성격이 짙다. 오죽하면 삼성 사람도 "현대차는 (강행을) 안 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
표결까지 했는데 부결됐다면? 정말 최악이었을지 모른다. 현대모비스뿐 아니라 현대차, 기아차 등에 40~50%의 지분을 가진 외국계 투자자들로부터 글로벌 기업으로서 확보해야할 기본적인 신뢰마저 잃었을 수 있다. 단기 투자차익에 급급한 헤지펀드들의 주주제안을 물릴 방어력도 잃고, 오랫동안 공들여 구축한 해외에서의 현대기아차 브랜드 가치도 훼손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터다.
▲ 지난 1월17일 경기도 용인 현대차 환경기술연구소에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오른쪽)이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에게 차세대수소전기차 넥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 현대차) |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현대차그룹의 지배개조 개편 중단은 '불가피한 차선책'이었다는 판단이다. 당장은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가 어색할 수 있지만 주주와 시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핵심적인 경영 현안에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오히려 현대차와 정 부회장에 긍정적 평가로 돌아오고 있다.
내부에서도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희망적 반응들이 적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격다짐'을 벗어나 시장과 호흡하는 의외의 세련된 선택을 보여준 것으로 회사가 더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갖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표결까지 해서 엎어진 게 아니어서 절차나 부분 수정 정도로 개편의 틀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점도 작지 않은 수확이다. 정부의 순환출자구조 해소 요구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번 셈이다.
오히려 정의선 부회장은 이번 '일보후퇴'로 오히려 현대차그룹 경영권 승계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배구초 개편을 물린 것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인식되며 여러 이해당사자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선택이어서다. 현대차그룹과 정 부회장이 '현재의 차선'을 '미래의 최선'으로 만들어 내느냐는 다시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