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한진그룹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예고한 가운데 오는 3월 대한항공 사내 등기이사 임기가 만료되는 조양호 회장의 연임이 어렵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조 회장의 연임 안건이 상정될 경우 표 대결이 불가피하지만 대한항공의 엄격한 정관이 오히려 조 회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 대한항공의 정관상 조 회장이 연임을 하기 위해서는 주총 참석주주중 67%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입장이고 다른 주주들도 동조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단순히 지분율만 놓고 보면 조 회장측(33.3%)이 국민연금(11.56%)보다 3배정도 많지만 주총에서 지지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 조 회장이 스스로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포기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조양호 회장의 선택은?
국민연금은 최근 몇년간 조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줄곧 반대표를 던져왔다. 조 회장이 그룹 계열사 사내이사를 모두 맡고 있어 업무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총수 일가의 일탈로 기업가치 하락이 더해진 만큼 반대 목소리를 낼 가능성은 더 커진 상황이다.
오는 2월 수탁자책임전문위원에서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결정할 경우 3월로 예정된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는 조 회장의 연임을 놓고 표 대결이 벌어질 수 있다. 혹은 그 이전에 조 회장 스스로 연임을 포기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연임 포기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은 국민연금과의 표대결에서 조회장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대한항공의 정관 때문이다. 대한항공 정관에 따르면 이사 선임시에는 출석 주주의 3분의 2이상(발행주식총수 3분의 1이상)으로부터 찬성을 받아야 한다. 일반적인 이사 선임 요건(출석주주 2분의 1)보다 엄격한 수준이다.
보통 기업들이 까다로운 정관을 두는 이유는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대항해 대주주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항공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적대적 M&A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대한항공의 엄격한 정관은 의외라는 시각도 있다.
IB(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는 "항공산업은 정부로부터 항공 면허권을 발급 받아야 가능한 사업으로, 면허권이 없는 일반기업이나 해외기업은 대한항공을 상대로 적대적 M&A를 할 수 없다"며 "대한항공이 정관을 다소 엄격하게 정한 것은 다른 외부요인으로부터 대주주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대주주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이번에는 조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는데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 표 대결 가능할까?
현재 대한항공 지분은 최대주주인 한진칼과 조 회장 일가 등 특수관계인이 33.35%(한진칼 보유지분중 16.66%는 증권사·저축은행에 담보 제공), 국민연금이 11.56%, 기타 주주가 55.09%를 보유하고 있다.
조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 등기이사 연임을 위해선 모든 주주가 주총에 참석한다고 가정할때 현재 가지고 있는 지분율 수준의 우호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반면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 입장인 국민연금은 외국인 주주나 기관투자자 등 기타주주들의 지분중 20%가량을 추가 확보하면 주총에서 연임 안건을 저지할 힘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이 조 회장의 연임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놓을 경우 주요 외국인 투자자나 기관들이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외국인 주주의 지분율은 16~17%로, 국민연금의 11.56%과 합쳐지면 20% 중후반대가 된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입김은 그간 적잖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5월 당시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안에 대해 국민연금 의결권 자문을 맡은 지배구조원을 비롯해 서스틴베스트, 대신지배구조연구소, ISS, 글라스 루이스 등 국내외 자문기관이 모두 '반대' 의견을 냈다. 이는 여론으로 이어져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안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 주총이 취소된 바 있다.
조 회장도 우호적 외국인 투자자나 기관, 소액주주들로부터 표를 끌어모아야 하지만 최근 한진그룹 총수 일가를 둘러싼 여론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놓고 표대결을 벌이기 보다 연임을 포기하지 않겠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조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조해 온 터라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연임을 포기할 수도 있다"며 "내년 3월 임기 만기인 한진칼 이사만 유지하고 대한항공은 장남인 조원태 사장에게 맡기는 구도로 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