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그룹 총수가 된지 2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아버지 고(故) 최종현 회장이 폐암으로 갑작스레 작고한 1998년부터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38세란 젊은 나이 때부터 그룹의 운명을 좌우하게 됐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LG그룹 구광모 회장이 각각 50대, 40대에 아버지로부터 총수직을 이어받은 것과 비교해도 빠르다.
젊은 최 회장은 그간 숨가쁘게 달려왔다. 2011년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를 인수한 이후 SK그룹은 국내 자산순위 3위 대기업집단(2019년 기준)으로 성장했다. 그는 2017년부터는 모든 계열사 정관상 핵심 가치에서 '이윤 창출'을 빼고 '사회적 가치 창출'을 넣도록 하는 등 '기업의 사회역할'을 중요시하는 색깔도 드러냈다.
하지만 20년 넘는 질주에서 멈춰 잠시 뒤를 돌아본 걸까. 최 회장이 SK그룹 회장이란 직함 뒤에 숨겨진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것도 고 최종현 전 회장에 이어 본인이 강조한 사회적 가치를 주창하는 포럼에서다.
◇ '사회적 가치'의 시작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총수 취임 후 6년이 지난 2004년 임원들과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동안 경영의 최우선 목표였던 이윤극대화라는 경영 이념은 다원화되고 복잡한 경영환경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며 이에 대한 단초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6년에는 기업이 순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에 창출한 가치를 계량화하자는 '더블 바텀 라인(Double Bottom Line, DBL)' 경영을 꺼내 들었다. 최근 SK그룹은 이에 발맞춰 사회적 가치를 계산하는 공식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최 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가치 한마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바램은 지난 28일 서울 광장동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소셜밸류 커넥트 2019' 개최에 이른다. 이날 행사엔 SK그룹과 사회적 기업을 포함한 80여개 기관이 참여해 사회적 가치에 대해 토론했다.
그간 최 회장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는 선대 회장의 경영철학을 승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최 전 회장은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최 회장 역시 여러 차례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견해를 밝혔다.(※관련기사 : 아버지의 꿈, 아들에게로…故 최종현 추모식)
하지만 최 회장이 밝힌 사회적가치 경영의 시작은 이같은 견해와 결이 달랐다. 그는 전날 행사 마무리 발언을 끝내고 난 뒤 '회장이 아닌 인간 최태원으로서 왜 이렇게까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나'란 질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밝혔다.
최 회장은 "회장이 아닌 자연인으로 대답해보라니 고민이 된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회장 취임 당시 IMF(외환위기)가 있었을 때로, 경영상황이 어려웠던 시기"라며 "그때부터 저는 전쟁을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최 회장은 이 과정에서 돈을 어떻게 벌지만 생각하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하는 지경까지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 가슴 속은 텅 비어버렸다"고 회고했다.
최 회장은 한 사람을 만나며 과거를 되돌아보게 됐다고 언급했다. 그는 "저와 아주 반대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돈에는 전혀 관심없고 전부 사람이었다"며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것이 제 목표가 됐다"고 돈 이외에 것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이어 "사회적 기업이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따뜻한 감성을 계속 받았다"며 "사회적 기업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측정 등을 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 '그 사람, 누구일까'
이같이 최 회장을 '사회적 가치 전도사'로 바꾼 인물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온다.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이는 그의 동거인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의 존재는 최 회장이 2015년말 언론사에 장문의 편지를 보내며 공식화됐다. 최 회장은 김 이사장과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아내인 노소영 나비아트센터 관장과는 별거 중이며,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티앤씨재단은 2017년 설립됐으며, 서울 한남동에 위치했다. 장학, 교육, 복지 및 학술연구 지원사업이 설립 목적이다. 재단 이름은 설립자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최 회장의 이름인 태원에서 'T', 김희영 이사장의 영어이름 '클로이(Chloe)'의 'C'가 출처다.
김 이사장은 현재 재단 대표로 재직 중이다.
최 회장은 이 재단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는 재단 설립이후 30억원을 현금으로 출연했다. 재단이 그간 받은 기부금 전액이다. 최 회장은 재단이 입주한 건물 전세금 가운데 2억원의 근저당권을 설정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달 19일 열린 재단 행사에 참석하며 김 이사장과 직접 대면했다.
티앤씨재단은 소셜밸류 커넥트 행사 참여기관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날 사회적 가치 관련 설명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사회적 기업 등이 마련한 개별 부스를 방문한 뒤 티앤씨재단 설명회에 참석하며 오후 일정을 마쳤다. 김희영 이사장도 이날 자리를 지켰지만, 최 회장과 동석하지 않았다.
다만 최 회장이 언급한 이를 김희영 이사장이라고 무작정 특정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옥중에서 집필한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란 책에서 그가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나온다. 그는 김 이사장과는 무관한 사람"이라며 "최 회장이 언급한 이는 그가 다니는 교회 목사일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는 추정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