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배터리 업계가 내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을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직 법안의 구체적 내용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자국 위주 정책이라는 점은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미국의 IRA 이후 유럽까지 핵심원자재법(CRMA)을 추진하면서 현지화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이에 대비한 국내 배터리 업계의 대응전략을 살펴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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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원자재값이 치솟으면서 배터리 재활용이 원자재 확보를 위한 핵심 대안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나 유럽의 지속가능한 배터리법 수정안에는 재활용에 대한 규정도 담겨있어, 향후 배터리 시장에서 재활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는 분야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이에 따라 국내 배터리 관련 기업들은 재활용 사업을 위한 협력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다만 초창기인 만큼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재활용은 북미에서만" 韓기업 진출 속도
올해 유럽연합에서 통과된 지속가능한 배터리법 수정안에 따르면 전기차 배터리는 오는 2030년부터 니켈(4%)·코발트(12%)·리튬(4%)·납(85%)의 재활용 원료 사용 비율이 의무화되며, 2035년부터 이 비율도 증가한다.
미국 IRA에도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에 사용된 핵심광물이 적용비율 이상 북미에서 재활용된 경우 수혜 대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추출과 처리의 경우에는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까지 수혜 대상에 포함돼 있지만, 재활용의 경우 북미 지역으로 조건이 한정돼 있다. 배터리 제조사나 광물업체에 비해 재활용 업체에 적용되는 기준이 더 까다롭다.
북미 진출이라는 큰 과제를 떠안은 국내 재활용 기업들은 해외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배터리 재활용 기업인 성일하이텍은 오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미국 조지아주에 2000만달러를 투자해 폐배터리 리사이클링 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인디애나주에도 리사이클링 센터 설립을 검토 중이다.
50여 년간의 제련소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폐배터리 시장에 뛰어든 영풍도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심태준 영풍 그린사업실 전무는 "5년 안에 미국 혹은 유럽 지역에 재활용 공장 설립 계획을 갖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쯤 지역을 구체화해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에코프로도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에 배터리 소재 생산부터 재활용까지 포함된 사업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국내 생산 공장과 마찬가지로 해외에도 양극재 생산의 모든 과정이 한 곳에서 이뤄지도록 한 에코프로만의 '클로즈드 루프 에코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에는 배터리 재활용 자회사인 에코프로씨엔지도 포함돼 있다.
최근 열린 '배터리 선도도시 포항 국제컨퍼런스 2022'에서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핵심 광물을 북미에서 재활용해야 원료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재활용 업체들은 북미에서 사업을 한다"며 "IRA뿐 아니라 유럽의 핵심 원자재법 등 재활용 사업을 역내에서 활성화하라는 메시지가 대내외적으로 강하게 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재활용 산업 성장 위한 '협력 과제'
국내 배터리 제조사도 재활용 산업 성장에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모양새다. 자체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기보다 재활용 기업과의 협력 관계를 쌓는 방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 4월 북미 최대 배터리 재활용 업체인 라이사이클과 10년간 2만톤의 니켈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은 작년 12월 600억원을 투자해 라이사이클 지분 2.6%를 투자하기도 했다.
SK에코플랜트는 지난 8월 미국 폐배터리 재활용 기업인 어센드 엘리먼츠에 5000만달러를 투자해 최대 주주에 등극했다. 업계에서는 어센드 엘리먼츠가 SK온의 북미 배터리 생태계에 주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SK온에 양극재를 공급하는 에코프로가 어센드 엘리먼츠로부터 재활용된 원료를 공급받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SK온이 생산한 사용 후 배터리를 어센드 엘리먼츠가 재활용하면, 에코프로는 폐배터리 원자재를 받아 양극재를 생산하고 이를 다시 SK온이 배터리 제조에 생산하는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만 업계에서는 배터리 재활용 산업 성장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욱 강한 협력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배터리 제조사와 재활용 기업의 협력뿐 아니라 재활용 기업 간 기술 교류 등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정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거린메이(GEM), 화유코발트, 브룬프(Brunp) 등 배터리 재활용을 선도하고 있는 중국 기업은 민간기업임에도 형제 회사처럼 똘똘 뭉쳐있다"며 "중국은 기술 교류가 활성화돼 있어 기술력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 배터리 재활용 관련 기업들은 개발한 것을 공유하고 서로의 기술을 벤치마킹해 함께 한 단계 올라가야 한다"고 짚었다.
이같은 주장은 배터리 재활용 기술이 완전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힘이 실린다. 재활용 기술은 아직 완성 단계라 말하기 어렵다. 표준화된 기술이 부재할 뿐 아니라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기술도 미흡하다. 현재 니켈·코발트·리튬·망간·구리 등 5개 원료를 추출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재활용 기업은 5곳에 그친다.
김홍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센터장은 "블랙매스에 포함된 양극활물질과 흑연이 함께 침출 용액에 투입되면 거품이 발생해 넘치는 '버블링 현상'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며 "기술 개발을 하더라도 바로 상용화가 가능하지 않을 수 있지만 꾸준히 시도해야만 발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재활용 업체가 원활히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공정 과정의 환경성도 고려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탄소중립 정책을 펴고 있어서다. 박재범 연구원은 "국내 기업들은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며 "글로벌 진출을 위해서는 공정 과정에서 탄소를 감축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배터리 관련 기업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될 수록 국내 산업은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망 기업들이 해외로 투자를 늘리면서 국내 투자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활용 산업 성장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해외 진출 압박이 들어오면 국내 산업은 공동화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지역 육성책이 나와야 한다"며 "세제 혜택, 기술 개발 지원 등 일반 기업이 할 수 없는 부분을 국가 차원에서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