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배터리 업계가 내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을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직 법안의 구체적 내용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자국 위주 정책이라는 점은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미국의 IRA 이후 유럽까지 핵심원자재법(CRMA)을 추진하면서 현지화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이에 대비한 국내 배터리 업계의 대응전략을 살펴본다. [편집자]
▷관련기사: [배터리 합종연횡]①IRA 대응에 바빠진 기업들(11월29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해 한국 배터리 관련 기업들이 북미 진출과 배터리 공급망 형성에 한창이다. 하지만 IRA 세부 시행령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법안 시행 전부터 공급망 확보에 대응해야 하는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불확실성을 안고 가야 한다.
시행령 따라 희비 갈릴 듯
IRA 법안을 보면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에 사용된 핵심광물이 적용비율 이상 미국에서 추출 및 처리된 경우, 또는 미국의 FTA 체결국가에서 추출 및 처리된 경우, 또는 북미에서 재활용된 경우 수혜 대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외의 세부 시행 요건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광물의 원산지 기준이나 처리 지역에 대한 기준 등이 명확히 설정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서 추출한 광물을 FTA 체결국에서 처리하면 보조금 대상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보조금 대상 기준이 광물을 추출한 지역인지, 추출한 광물을 처리하는 지역인지 명확하지 않아서다.
현재 기업들의 선제적 대응도 이 정도 해석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SK온과 리튬 23만톤 공급 계약을 맺은 호주 레이크 리소스의 경우 아르헨티나 내 4개의 리튬 염호와 1개의 리튬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다.
SK온은 레이크 리소스로부터 공급받은 아르헨티나산 리튬을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정제한 후, 북미 사업장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이다. FTA 체결국에서 처리했으니 IRA 보조금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세부 시행령이 발표됐을 때 FTA 미체결국에서 채굴한 광물을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FTA 미체결국에 대한 규제는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IRA의 목적이 중국을 배제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외 국가들에 대한 규제는 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업계 관계자는 "IRA의 본질적 목표를 봤을 때 중국, 러시아 등 위험국에서 추출한 광물을 사용하면 확실히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겠지만,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나라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관측했다.
일각에서는 IRA가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세부 시행 요건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책 시행이 지연되거나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다만 미국이 신재생 에너지 투자 확대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IRA 법안이 엎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새로운 에너지 전환 시대에 누가 경제 패권을 가져가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세부안 조정으로 인한 지연 가능성은 있으나 무산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대규모 투자에 비용 증가 부담
국내 배터리 기업에는 IRA가 사업 확대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막대한 투자가 동반돼야 하는 만큼 우려도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은 국내 배터리사 중 현지화 전략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이에 따른 비용 증가에 대한 우려도 안고 있다. 실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의 부채는 올 3분기 기준 18조7248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24.7% 늘었다. 같은 기간 차입금도 6조9691억원에서 8조3214억원으로 19.4% 증가했다. 대신 부채 증가와 함께 자본도 함께 늘어나면서 부채비율은 작년 말 171.8%에서 88.5%까지 줄었다.
SK온은 최근 최대 1조3000억원의 자금조달에 성공하면서 숨통을 텄다. 올 3분기는 134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전 분기(3266억원) 대비 적자 폭이 줄었다. 4분기부터는 분기 기준 흑자전환도 기대된다. 하지만 아직은 국내 배터리사 중 유일한 적자 기업이다.
특히 IRA와 유사한 유럽연합(EU)의 핵심 원자재법(CRMA)이 구체화 돼 투자 규모가 더 커지면 각 기업의 출혈 경쟁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CRMA 역시 아직 내용은 구체화 되지 않았지만 핵심원자재가 역내에서 밸류체인을 형성할 수 있도록 현지화를 유도하는 법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이 지정한 핵심원자재에는 리튬, 코발트, 천연 흑연 등이 포함돼 있다.
코트라 벨기에무역관에 따르면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 티에르 브르통은 성명서를 통해 "핵심 원자재법은 2030년까지 EU 정제 리튬 수요의 최소 30% 역내 조달, 재활용을 통해 희토류 최소 20% 회수 등의 공동 목표를 도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올 9월 핵심 원자재법을 입법 예고한 후 구체적인 법안 마련을 위해 지난달까지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했다. 수렴된 의견을 바탕으로 입법 영향 평가를 거쳐 내년 1분기 내 초안이 제안될 예정이다.
정혁성 LG에너지솔루션 상무는 최근 '배터리 선도도시 포항 국제컨퍼런스 2022'에서 "심화된 규제 때문에 결국 공급망을 현지에 갖춰야 하고, 이는 결국 투자로 연결돼 비용이 올라가 또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