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m 남짓한 로봇이 아파트 단지를 누빈다. 스스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엘리베이터도 기다린다. 장애물은 알아서 피한다. 한번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6시간은 거뜬하다. 야간 이동도 무리 없다.
국내 스타트업 모빈이 만든 배달 로봇이다. 무엇보다도 평지 이동에 국한했던 기존 배달 로봇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 배달 로봇은 올해 4월 편의점과 함께한 시범 서비스를 마치고 내년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신사동 주택전시관을 시작으로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단지 등에서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최진 모빈 대표는 "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현대차그룹 투자를 받아 이 정도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면서 "현대차그룹사들과의 협업을 늘려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200개 스타트업에 1조원 넘게 투자
모빈 외에도 현대차그룹에서 투자받은 스타트업은 200여 곳이 넘는다. 현대차그룹이 2017년부터 스타트업에 투입한 자금만 약 1조3000억원에 이른다. 해외 투자를 제외한 수치다. 투자 영역은 특정하지 않았다. 모빌리티 서비스, 전동화,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로보틱스 등 미래 신사업 영역이라면 현대차그룹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현대차그룹 임직원의 아이디어도 눈여겨본다. 스타트업 못지않게 지원한다. 활용 가능한 아이디어를 보유한 자체만으로도 투자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들과 평균 5년 이상 협업한다. 진가를 발휘하도록 충분한 시간과 자금을 제공한다. 현대차그룹 오픈이노베이션 황윤성 상무는 "앞으로도 전망이 밝고 전략적 이득이 분명하다 싶으면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달 로봇 외 건물 외벽을 촬영해 미세 결함을 발견하는 드론, SNS 인플루언서와 아이돌 그룹을 배출한 메타버스, 공간에 어울리는 곡을 제안하는 콘텐츠, 도시 형상을 3D로 복제해 만들어낸 정밀지도 제작 스타트업 등도 현대차그룹에서 투자를 받아 탄생한 결과물이다.
현대차그룹이 이처럼 투자를 지속하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100년 넘게 이동 수단으로만 여겨졌던 자동차는 최근 하나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장소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자동차 내부에서 경험이나 체험이 중요해진 시대라는 생각이다. 콘텐츠 발전은 한 회사의 노력만으로 한계가 있다. 스타트업 투자로 콘텐츠에 대한 새로운 시각, 새로운 접근 등을 해내겠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궁극적인 목표다.
현대차그룹이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혁신 분야는 SDV(소프트웨어로 지속 진화하는 자동차), 자원순환, 저탄소,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기술 등이다. 전 세계에 숨어있는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과감한 협업 전략을 펼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미국, 독일, 이스라엘, 중국, 싱가포르 등 5개 국가에 크래들(cradle)이라는 혁신거점을 운영 중이다. 국내에는 오픈이노베이션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는 제로원(zero1ne)을 설립했다.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총 19개의 투자 펀드도 운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