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창사 이래 최초로 파업에 돌입한다. 지난 28일 올해 임금협상을 위한 '제8차 본교섭'에서 입장 차이를 조율하지 못한 탓이다. 방식은 '단체 연차' 사용이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내달 7일 당일 연차를 쓰는 방식으로 파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7일 단체 연차 파업 "책임은 사측에"
전삼노는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초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파업을 선언했다. 현재 전삼노의 조합원은 삼성전자 전체 임직원(약 12만명)의 20% 수준인 2만8400명가량이다.
이날 한기박 전삼노 쟁의대책위원장은 "이 모든 책임은 노조를 무시하는 사측에 있다"며 "전삼노는 교섭을 타결하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사측은 아무런 안건도 없이 교섭에 나와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전삼노는 24일 2차 쟁의 당시 28일 본교섭이 무산될 경우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전삼노에 따르면 8차 본교섭에서 삼성전자 사측은 전삼노에서 공문을 통해 교섭에서 배제해달라고 요청한 교섭위원 두 명을 사전 예고 없이 참석시켰다. 이에 전삼노 측이 반발하자, 사측은 전삼노의 태도를 문제 삼아 교섭을 거부했다.
전삼노는 이 밖에도 사측이 노동조합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왔다는 입장이다. 이날 손우목 전국삼성전자노조 위원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노동조합이 요청하는 것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서 노사협의회 또는 사측이 노조가 한 요구를 일방적으로 발표해 적용하는 등 노조 파괴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괜찮은 안건도 노동조합과 합의하지 않고, 사측이 일방적으로 발표해 교섭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삼노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육아휴직 상향 평균화에 대한 노조에 요청에 대해 교섭 중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대표이사 결정에 한 순간 입장을 바꿨다. 나아가 교섭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조합과 합의하지 않고 사측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복지 정책을 발표했다.
손 위원장은 "그룹 총수인 이재용 회장의 무노조 경영 철폐 선언에도 사측의 태도 변화가 없다"며 "직원들이 분노하고 있음에도 아무 입장조차 발표하지 않는 사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노동자 권익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징검다리 연휴 연차 파업, 이유는
삼성전자의 첫 파업은 '조합원 단체 연차 사용'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삼노는 조합원의 원활한 참여를 위해 파업 날짜를 6월6일 현충일 이후 징검다리 연휴로 정했다. 이와 함께 서초사옥 앞에 파업 선언 현수막을 내건 버스와 트럭을 세워두고 24시간 농성도 진행한다.
전삼노가 파업을 결정한 것은 사측의 적극적인 대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사측이 교섭 현장에 대화 안건을 가져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촉구하는 차원이다. 연차 파업이라는 소극적 파업 방식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현국 전삼노 부위원장은 "우리는 생산 차질을 일으켜 삼성전자를 괴롭히겠다는 게 아니다"라며 "회사에 타격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파업을 결심할 만큼 회사가 노조를 무시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삼노는 삼성전자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한다"며 "내 밥그릇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 노조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전삼노 측은 향후 사측과의 본교섭을 이어가고 싶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손 위원장은 "전삼노는 지속적으로 회사에 교섭을 진행하자고 얘기하지만 사측이 안건을 가져오지 않고, 와서 앉아만 있다"며 "사측에서 안건을 가져와야 얘기가 된다"고 말했다.
"성과급 더 달라 파업하는 게 아니다"
전삼노의 핵심 주장은 '성과급 지급의 투명성 확보'다. 성과급 지급 기준을 EVA(경제적 부가가치·Economic Value Added)가 아닌 영업이익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연말 한 차례 지급되는 성과급 OPI(초과성과이익금)를 세금과 각종 비용을 제외한 EVA에 따라 산정해 지급하고 있다. 영업이익의 절대 숫자가 커도 비용을 많이 썼다면 EVA는 낮을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손 위원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임금 1~2% 인상, 성과급을 많이 달라는 것이 아니다"라며 "일한 만큼 공정하게, 제도 개선을 통해 투명하게 지급해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전삼노는 삼성전자의 처우 개선이 결국 국내 모든 기업의 노동자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있다. 손 위원장은 "삼성전자가 모든 삼성 계열사와 협력사의 기준이 된다"며 "삼성전자만의 처우 개선이 아닌 삼성그룹 및 협력사, 나아가 국내 모든 기업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론 계속되는데…노조 "위기 아니다"
다만 반도체 사업의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삼성전자 노조가 파업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올 1분기 흑자로 돌아섰지만, 지난해 4개 분기 내내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DS 부문의 영업손실액은 △1분기 4조5800억원 △2분기 4조3600억원 △3분기 3조7500억원 △4분기 2조1800억원으로 연간 적자 규모만 14조87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최근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황 회복을 이끈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리며, 메모리 시장에서 주도권을 뺏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손 위원장은 삼성전자는 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회사는 지난 10년간 계속 위기라고 외치고 있다"며 "위기를 이유로 노동자가 핍박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도 "경영 위기 이전에 직원들의 사기가 바닥을 찍고 있다"며 "경력직 다 이탈하고 있고, 삼성전자 이탈은 지능 순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토로했다.
이어 "유능한 선배와 인재들이 다 나가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통해)그 인재들을 다시 삼성으로 모이게 해 일하게 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전삼노의 파업 선언 이면에는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가입을 목적으로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삼성 계열사 5곳을 아우르는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초기업 노조)은 "파업을 삼성전자 최초로 시도 하는 것에 대해 응원한다"면서도 "다만 최근 행보를 보면 직원들의 근로조건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상급단체(민주노총) 가입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 그 목적성이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