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원대에 이르는 외부위탁운용(OCIO) 시장 공략을 위한 금융투자업계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기존의 대규모 공적기금과 공공기관 중심에서 민간 기업과 대학 기금 등으로 그 타깃이 폭넓게 확대되는가 하면 자산운용사가 주도하던 시장에 증권사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판도 변화도 감지된다.
각종 공제회와 교내 적립금 또는 사내 유보금을 운용하려는 대학과 기업 등의 잠재적 수요가 풍부한데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비롯한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수단으로서의 매력까지 부각되고 있는 만큼 OCIO 시장의 패권을 둘러싼 업계의 각축전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 삼성운용, 서울대 이어 이대 기금 위탁운용…운용사가 시장 선점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자산운용은 지난해 말 이화여대와 1500억원 규모의 학교 기금 위탁운용 계약을 맺었다. 사립대과 OCIO 계약을 맺은 건 삼성운용이 처음이다. 삼성자산운용은 2019년 서울대와 2000억원 규모의 발전기금 위탁운용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이번에 이화여대 기금 위탁운용사 지위를 따내면서 아직 국내에선 초기 단계인 대학 기금 운용 시장에서 강자 이미지를 구축했다.
삼성자산운용 관계자는 "서울대 발전기금이 목표 대비 우수한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며 "이화여대 기금 역시 안정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재정 건전성 제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OCIO는 자산운용의 전반을 포괄적으로 외부에 위탁하는 운용 체계를 말한다. 기존 위탁 방식과 비교하면 위탁운용기관에 전략적 의사결정에 대한 권한이 더 많이 주어진다. 우리나라는 2001년 공적연기금투자풀로 시작해 100조원에 달하는 전체 운용자산의 80% 이상이 주택도시기금과 산재보험기금, 고용보험기금, 공적연기금투자풀, 민간연기금투자풀 등 5개 대형 공적기금에 집중돼 있다.
현재는 자산운용을 본업으로 하는 운용사들이 OCIO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자산운용이 기획재정부 연기금투자풀(일부)과 고용노동부 산재보험기금 등의 위탁운용을 맡아 국내 금융투자회사로는 가장 많은 30조원 이상의 돈을 굴리고 있다.
또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국토교통부의 주택도시기금(20조4000억원)과 주택도시보증공사, 강원랜드 등의 위탁운용사로서 21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하고 있고 한국투자신탁운용 역시 기재부 연기금투자풀과 민간연기금투자풀 등 10조원을 웃도는 자금을 맡아 운용 중이다. 이외에 KB자산운용과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등도 지난해 건강보험공단 대체투자 주간운용사에 선정돼 각각 7000억원의 자금을 굴리고 있다.
◇ NH·한투 이어 미래에셋대우 등 증권사 OCIO 진출 본격화
최근 들어선 대형 증권사들의 OCIO 진출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OCIO 사업은 투자일임업 자격만 보유하면 누구나 뛰어들 수 있어 증권사들 또한 참여가 가능하다.
이미 NH투자증권은 미래에셋운용과 주택도시기금의 위탁운용을 나눠 맡고 있는 것을 비롯해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내일채움공제 성과보상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증권사 중에서 일찌감치 OCIO 시장에 진출한 한국투자증권은 7조원 규모의 고용노동부 고용보험기금을 운용 중이다.
자기자본 기준 국내 최대 증권사인 미래에셋대우는 민간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7개 기업으로부터 종합자산 위탁운용 형태로 5400억원을 유치했다. OCIO 총 운용 규모도 작년 말 기준 15조7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0% 넘게 늘렸다. 미래에셋대우 관계자는 "증권사 중 유일하게 자금을 직접 운용하는 바이사이드(Buy side) 리서치 조직인 고객글로벌자산배분본부를 보유하고 있어 톱다운(Top-Down·하향식) 방식의 접근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고 전했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가능성 등 성장 잠재력…증권·운용사 조직개편 대응
OCIO는 평균 운용 보수가 0.04% 내외로 인건비를 비롯한 제반 비용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금융투자회사 입장에서 당장 수익이 되는 사업은 아니다. 그러나 향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놓칠 수 없는 시장이기도 하다.
특히 고용노동부가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 수익률 향상을 위해 도입을 검토 중인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가 현실화되면 시장 규모가 순식간에 커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 퇴직연금 규모는 222조원대로 이중 DB형은 126조원을 웃돈다. 업계 일각에선 OCIO 시장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으로 성장에 탄력을 받게 되면 지금보다 10배 이상 확대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하고 있다.
게다가 민간 기업의 유보금과 대학 기금 등의 투자처로 활용되던 사모펀드 시장이 라임과 옵티머스 등 연이은 대형 사고로 신뢰를 잃게 되면서 마땅한 투자 수단을 찾지 못한 기업과 대학들이 금융투자회사들에 자금의 운용을 맡기는 사례가 늘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OCIO 시장의 성장 기대감과 미래 수익원으로서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으면서 금융투자회사들은 관련 조직을 재정비하고 본격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KB자산운용은 얼마 전 이현승 단독대표 체제 전환 후 첫 조직 개편에서 상품 기획과 개발, 판매를 총괄하는 기관 M&S본부와 외부위탁운용관리(OCIO)본부를 통합하고 김민호 기관M&S본부장 겸 OCIO본부장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사측은 이번 조직 개편에 기관 자금과 연기금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겠다는 뜻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같은 그룹 계열사인 KB증권은 OCIO 관련 영업과 마케팅 경쟁력 강화를 위해 OCIO마케팅팀을 OCIO영업부로 확대 개편했다.
이보다 앞서 미래에셋운용도 OCIO 시장에서의 주도권 확보 목적으로 마케팅3부문 총괄을 신설했고 NH아문디자산운용을 비롯한 다른 금융투자회사들도 OCIO 부서를 조직했거나 준비하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형 공적기금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내 OCIO 시장에 민간 기업이나 대학기금 같은 다양한 특성의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며 "최근 관련 법안이 재발의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역시 OCIO 시장 활성화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남 연구위원은 다만 "국내 OCIO 시장은 해외와 비교해 위임되는 업무 범위와 운용 재량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며 "자금의 집합운용과 개별 자금의 다른 특성이 반영되는 맞춤 운용을 동시에 구현하는 유연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