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여파로 채권 금리가 널뛰기하는 가운데 증권사와 연기금들의 채권 운용 실적 악화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채권 금리가 급등하면서 평가 손실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와 연기금들이 그간 저금리 기조 속에서 채권 보유 규모를 꾸준히 늘려온 터라 손실 규모가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향후 채권 수익률을 결정지을 금리 향방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증권사 보유채권 253조…금리발작에 손실 불가피
26일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증권사 채권 보유 규모는 253조84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직접 증권사가 자기자본으로 사들여 운용하는 물량과 거래 중개 물량을 합친 수치다. 1년 전인 2020년 말과 비교해보면 9조1800억원가량 증가했다.
채권 시장은 지난 2년여간 호황을 누려 왔다. 지난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이후 각국 정부가 유동성 공급에 나서며 초저금리가 2년간 유지된 덕분이다. 우리나라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인 0.50%로 내려앉은 가운데 국채금리 역시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3년만기 국고채 금리는 2020년 1월2일 1.327%에서 그해 8월5일 0.795%까지 하락했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금리가 내려가면 가격은 상승한다. 이 기회를 활용해 증권사와 연기금은 채권 보유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올 들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우려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긴축 공포로 금리가 급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3년물 금리는 지난 11일 3.186%까지 치솟으며 신고점을 다시 썼다. 올 초 1.855%에서 3개월 만에 무려 1.33%포인트 뛴 셈이다. 채권 운용은 손실구간에 진입했다.
이에 증권사들의 채권 운용 실적도 맥을 못추고 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시장금리가 0.50%포인트 상승할 경우 증권사의 채권평가 손실 예상 규모는 9000억원에 이른다. 전체 증권사 자기자본의 1.3%, 작년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의 9.4%에 달하는 규모다.
실제 지난주 1분기 실적 발표 테이프를 끊은 NH투자증권의 1분기 트레이딩 부문 손실은 914억원으로 확인됐다. 증시 전문가들은 채권 운용 수익 저하를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정태준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분기 말 금리 급등으로 채권 운용에서 손실이 발생할 것은 예상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박혜진 대신증권 연구원도 "금리가 급등하면서 각종 운용 및 평가손익이 반영되는 상품운용 실적이 부진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금리 급등에 당황한 일부 증권사는 패닉셀(공포 매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 운용역은 "통상 증권사들의 채권 운용 실적은 상반기에 돈을 쌓아놓은 다음 하반기 때 얼마나 지키는지에 따라 결정되는데, 올해는 연초부터 상황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최근 손절 물량이 많이 나왔지만 다음 달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열릴 때까지 채권을 쥐고 있기로 한 증권사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국민연금 채권 수익률도 '흐림'
증시 큰손인 연기금 역시 채권 운용에서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국내 채권 수익률은 작년 말 –1.30%에서 올 1월 말 –1.35%로 더 나빠졌다. 해외 채권 수익률 역시 7.09%에서 0.05%로 크게 뒷걸음질 쳤다.
몇 년 새 채권 보유액이 증가했던 만큼 손실 규모도 클 것으로 우려된다. 국민연금의 채권 보유액은 작년 7월 말 400조원을 넘겨 올 1월 말 기준 401조4600억원에 이른다. 이는 2020년 말(370조9800억원) 대비 30조4800억원 늘어난 것이다. 지난달 말 금리가 급등세를 보인 만큼 운용실적이 악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당장 채권을 처분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는 경우 나중에 금리가 회복됐을 때 평가 손실을 만회할 여지는 있다. 시장에서는 금리 방향성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단기 급등 직후 안정세 진입을 전망하는 낙관론이 존재한다. 정태준 연구원은 "시장금리가 단기적으로 과도한 상승을 보였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추가 상승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허정인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금리 상승은 오버슈팅이 아닌 공장값에 부합한 레벨"이라면서도 "아직까지 긴축 영향력을 직접 겪지 않은데다 물가 피크아웃(정점 통과)이 2분기로 이연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추가 상승 여지는 남아있다"고 했다.
또 다른 채권 운용역 역시 "금리가 고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며 "연내 금리 방향성은 한국은행이 얼마나 금리를 더 올릴 것인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신임 한은 총재의 스탠스 등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