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감사 및 세금, 법률, 재무 등의 자문서비스를 하는 글로벌 기업 딜로이트가 지난 2월 발간한 '이사회실의 여성(Women in the boardroom)'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 이사회의 여성 비율은 7.8%다. 이사회 구성원 10명당 여성이사가 1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 우리와 같은 아시아권, 정확히는 동남아시아에 속하는 말레이시아의 상장사(시가총액 상위 100대 상장기업 기준) 이사회의 여성 비율은 25.8%다. 우리보다 약 4배 많은 여성들이 상장기업 이사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가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며 이들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국교도 이슬람교다. 이슬람교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제한하는 등 인권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종교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이란의 히잡 시위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볼 때 말레이시아의 이사회 여성비율이 높은 것은 의외의 결과다.
비즈니스워치 취재팀은 말레이시아 이사회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말레이시아 정부산하 투자유치기관인 인베스트케이엘(Invest KL)의 비비안 시아(Vivian Sia) 미국 투자자관계 담당 이사(이하 비비안 시아 이사)를 만났다.
인베스트케이엘은 말레이시아정부 산하 기관으로 해외의 다양한 기업 및 자본들이 말레이시아 기업에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힘쓰는 곳이다. 말레이시아 기업과 해외 기업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한다. 국내 차량공유업체 1위인 쏘카도 인베스트케이엘과 연계해 말레이시아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인베스트케이엘은 현재 120개 이상 다국적 기업을 말레이시아에 유치했다. 투자규모는 200억 링깃(한화 약 5조8800억원)에 달한다. 인베스트케이엘의 투자유치 노력 덕분에 말레이시아의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투자유치 초기부터 투자가 끝난 이후에도 모든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다"며 "말레이시아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로 활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노력한 이사회 다양성
취재팀은 이러한 역할을 하는 인베스트케이엘이 말레이시아기업 거버넌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여성비율이 유독 높은 말레이시아 이사회 구성의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비비안 시아 이사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단순히 1~2년이 아닌 아주 오랫동안 강조해 온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 상장 기업들의 이사회 여성비율이 높은 것은 정부의 정책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정부가 추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예로 들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2년부터 시작한 '30% 클럽 말레이시아(The 30% Club Malaysia)'라는 캠페인이 있다. ‘30%클럽’ 캠페인은 말레이시아를 포함 20개국 이상에서 1000명 이상의 기업 이사회 의장과 CEO들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조직이다. 말레이시아에도 이 조직이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 캠페인을 통해 상장 기업들의 이사회 여성 비율을 30% 이상 채워야 한다고 기업들에 권고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기업거버넌스코드(MCCG)에도 'The board comprises at least 30% women directors(이사회는 적어도 30%의 여성이사로 구성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30%클럽 조직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올해 100대 기업의 이사회 여성 비율이 28.2%라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사회뿐만 아니라 각 부서의 부서장도 여성이 많아야 하도 시니어 이상 레벨의 직원도 여성들이 많아야 함을 정부가 강조하고 있다"고 답했다.
단순히 이사회 여성 비율을 30% 채워야 하는 캠페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가능하도록 출산휴가를 기존 60일에서 90일로 연장했다. 또 임산부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거나 임의로 부서를 옮기는 등 통제할 수 없도록 노동법에 속하는 강령도 만들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정책이 바로 재택근무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예를 들면 기업들이 3일은 출근하고 2일은 재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많이 적용하고 있다"며 "육아나 가정을 돌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을 재택근무 제도를 통해 보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기업들의 이사회 여성비율이 높은 것은 정부의 다양한 여성정책과 이사회 내 여성비율을 30% 이상 채우도록 하는 ‘30%클럽 말레이시아’ 캠페인의 역할이 크다.
다만 이사회 여성비율을 30% 이상 채우지 못했다고 해서 페널티를 받지는 않는다. 왜 채우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 의무도 없다. 그럼에도 이사회 여성비율이 높은 것은 정부의 정책을 잘 지키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배려하는 기업들의 노력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지난해 한 리서치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5000개 기업을 대상으로 29개 경제부문 관련 설문조사를 한 결과 말레이시아는 여성들이 중역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40%를 넘었다"며 "이는 재택근무 등 자유로운 근무시간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나온 결과"라고 강조했다.
왜 말레이시아는 다른가?
우리나라의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여성 사회활동 지원을 위한 제도들도 말레이시아에 뒤처지진 않는다. 우리나라의 노동법 상 육아휴직 기간은 1년 이내다. 육아휴직을 이유로 여성 직원들에게 불리한 처우를 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기업의 중역자리, 나아가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다른 이슬람 국가 및 한국 등 주요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말레이시아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두드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비비안 시아 이사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 달리 말레이시아는 처음부터 다양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며 국가를 운영해 온 것이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60%가 이슬람교를 믿고 말레이계가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중국, 인도, 사라왁 원주민족 등 다민족, 다인종이 분포하고 있는 국가다. 다양한 민족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말레이시아 정부는 물론 이들을 고용해야하는 기업도 포용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비안 시아 이사는 "다문화, 다인종 국가인 만큼 다른 민족과 문화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사회의 다양성 확보가 중요한 이유
비비안 시아 이사는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 확보는 기업의 의사결정과 거버넌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녀가 각자의 강점을 통해 기업운영방식에 전략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며 “가령 기업운영에서 남성들은 M&A 등 투자나 외부확장에 중점을 두는 반면 여성들은 직원들의 근무방식이나 회사내부정책 등 내부개혁에 더 초점을 맞추고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성과, 즉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놓칠 수 있는 근무방식이나 직원을 대하는 태도, 의사소통 과정 등을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당장 단기간의 이익보다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밑거름 역할을 한다.
초고속 성장을 해온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국내 대표 IT기업들이 최근 잇따라 조직문화, 성과보상, 주주가치 훼손 등 다방면에서 논란에 휩싸인 배경도 거버넌스 문제가 지목되고 있다. (관련기사 "거버넌스, 자본시장의 기업가치 평가 잣대")
취재팀이 말레이시아의 이사회 여성 비율에 주목한 것도 단순히 남녀평등의 관점이 아니라 기업 거버넌스의 핵심인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 확보를 고민하기 위함이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은 경영 판단의 효율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케 해주는 요소라는 많은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6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163개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임원급에 여성비중이 많은 경우 기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해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임원급에 여성비중이 많은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고 더 높은 품질의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양한 사안에 대해서 보다 전략적인 접근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기업이 다양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