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기업지배구조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1999년 9월 만들어진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Corporate Governance Codes, CG코드)은 주주의 권리부터 이사회의 책임과 의무, 내·외부 감사의 역할, ESG모범규준 등 기업경영전반에서 지켜야할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를 관리하는 한국ESG기준원(KCGS, 구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2003년 설립 이후 꾸준히 변화한 정치·경제·사회 분위기에 맞춰 CG코드를 손질해왔다.
이처럼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꽤나 오래됐지만 여전히 한국 기업지배구조에 물음표를 던지는 시선이 많다. 그 중 외부에서 한국기업 지배구조에 냉철한 평가를 내리는 곳이 바로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다.
홍콩에 있는 ACGA는 1999년 아시아 경제와 자본시장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효율적인 기업지배구조 구축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ACGA는 2년 마다 아시아 퍼시픽 마켓(CLSA Asia-Pacific Markets)과 함께 'CG Watch'라는 정기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에는 아시아 국가들의 기업지배구조를 평가한 순위가 담겨있다. 가장 최근보고서 'CG Watch 2020'에서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종합점수는 52.9%로 아시아 12개국 중 9위였다.
최근 카타르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며 아시아의 최강자의 면모를 뽐낸 축구와 달리 기업지배구조 수준은 아시아 최하위권이다.
대체 왜 우리 기업 지배구조에 점수를 박하게 주는지 ACGA에 직접 물어봤다.
ACGA에서 한국과 중국 연구·조사 담당인 스테파니 린(Stephanie Lin) 매니저는 "순환출자, 기업분할, 저배당 등 한국의 재미있는 관행은 지배주주들의 지배력 유지를 위한 것인데 이는 기업의 효율성이나 혁신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비즈니스워치 취재팀은 순환출자, 기업분할(물적분할), 저배당 등 한국의 고질적인 기업운영방식을 '재미있는 관행'이라고 표현한 스테파니 매니저와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한국 밖에서 바라본 한국 기업지배 구조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그의 답변은 직선적이고 분명했다. 한국의 기업지배구조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사회의 독립성 문제를 안고 있으며, 소액주주를 보호할 정책도 부족하다는 점. 아울러 대안을 제시해야할 전문기관도 소극적이라는 점을 거침없이 꼽았다.
다음은 스테파니 매니저와의 일문일답이다.
- 최근 발간한 ACGA의 보고서 'CG Watch2020'에 따르면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종합점수는 52.9%로 아시아 12개국 중 9위다. 2018년 CG Watch보고서에서 한국은 46.2%의 점수를 받았다. 점수는 왜 올랐나
▲ACGA는 CG Watch2020의 평가방법을 좀 더 세부적으로 바꿨다. 이후 한국의 기업지배구조는 전반적으로 점수가 올랐다. 진정한 의미의 개선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중요한 입법과 정책 변화가 있었다.
- 그래도 여전히 하위권이다. 한국 기업지배구조에서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에서 기업지배구조 규칙과 관련해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상장기업들이 ESG관련 정책을 사업보고서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등의 개선은 적어도 2025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미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또 한국은 소액주주 보호에도 여전히 한계가 있다.
-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말해준다면
▲가령 한국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할 때 내부이사도 위원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또 감사를 선임할 때 결격사유를 '최근 2년내 전직 임원이나 이사'로 한정하는 것은 그 기간(쿨링오프)이 너무 짧다. 의무공개매수제도(전체 주주의 지분을 최대주주와 차별 없이 공정하게 매수해야 하는 제도)도 없다. 이로 인해 한국은 인수합병(M&A)과정에서 모든 주주가 공정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 ACGA는 한국공인회계사회(KICPA), 한국상장회사협의회(KLCA), 금융투자협회(KOFIA) 등 주요 기관들에 대한 문제도 지적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전문 기관들이 기업지배구조 규칙에 관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관은 기업지배구조 규칙에 대해 간접적으로만 관여한다. 다른 국가들은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선진적인 결과를 내놓는다. 반면 한국 전문 기관들의 노력은 매우 미미하다.
- 한국 기업지배구조를 바라볼 때 좋게 본 부분은 무엇인가
▲한국의 투자자들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의 투자자들에 대한 평가는 한국이 2018년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주요 지표 중 하나였다. 2018년 보다 점수가 11%포인트 증가한 44%를 기록했다. 대형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 정책을 공시하고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 투자자라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를 주로 말하는 것인가
▲맞다. 우리는 CG Watch2020에서 국민연금, 사학연금 등 주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들의 의결권 정책을 살펴봤다. 국민연금과 사학연금은 의결권을 공개하고 특히 국민연금은 ESG를 고려해 의결권을 행사했다. 자산운용사들도 모두 의결권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의결권 정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때문이라고 본다.
-CG Watch2020에서 '차등의결권' 도입도 문제 삼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편집자: 여기서 말하는 차등의결권 도입이란,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에게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의미한다. 해당 법률은 국회에 제출됐으나 아직 통과는 하지 못했다
▲한국의 차등의결권 제도는 벤처기업에만 적용할 수 있고 기술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면 장기적으로 기업지배구조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이 제도를 기존 상장기업 나아가 대기업 및 재벌까지 확장해 적용할 수도 있다. 이는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중대한 후퇴가 될 것이다.
- 한국의 ESG 이행수준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금융위원회가 2021년부터 상장기업의 ESG보고(사업보고서에 ESG관련 내용을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것)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적어도 2025년까지는 완전 의무화하긴 힘든 상태며 이마저도 자산 규모가 2조원 이상인 기업들만 적용한다. 적어도 코스피 상장기업 전체에 적용하기까지는 최소 2030년까지 걸릴 것으로 보인다. CG Watch2020 작성 당시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이 ESG보고 규정을 발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ESG보고는 의무가 아닌 자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어떤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2015년부터 ESG보고 의무를 추진하고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기업에 ESG보고를 오랫동안 요구해온 곳이다. 인도는 올해 회계연도부터 의무적으로 ESG보고를 의무화했다. 대만은 내년부터 대만증권거래소에 속하는 560개 이상 기업들이 ESG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매번 CG Watch보고서 최하위에 속했던 필리핀도 2019년부터 ESG 내용을 담은 지속가능성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 다시 기업지배구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올해 한국 자본시장에선 '물적분할'이라는 주제가 큰 이슈였다. LG화학이 배터리사업을 떼어내 LG에너지솔루션을 만들면서 주주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사건은 많은 소액주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LG화학 사례는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전형적인 사례다.
- 이런 문제가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 상법에는 물적분할 시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조항이 없다. 소액주주 역시 이를 문제 삼아 기업 또는 지배주주를 법정에 세울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 최근 한국의 금융위원회는 물적분할 주주보호 방안을 내놨다. 물적분할 시 주주보호정책을 담아 공시를 강화하고 물적분할로 떨어져 나온 기업에 대한 상장심사를 강화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방안 등이다
▲한국 금융위원회가 물적분할에 대한 주주보호 강화 방안을 일부 내놓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분할 후 새로 설립한 기업에 대해 신주인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 한국 기업지배구조 문제에서 항상 나오는 것이 가족경영체제, 이른바 재벌문제다. 어떻게 바라보는가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 경제는 대기업(재벌)이 지배하고 있고 이는 한국 기업지배구조 문제의 근원이다. 순환출자나 기업분할(물적분할), 저배당 문제 등 한국의 '재미있는 관행'은 지배주주들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직간접적인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효율성이나 혁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견제하려는 독립적인 이사들도 부족하다.
- 한국 소액투자자들의 문화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주주들의 주주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개인투자자 기반이 크게 성장했고 이들이 다른 해외 시장과 기업지배구조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주주가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두 후보(윤석열, 이재명)의 선거운동에서도 주주권리를 보호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정책들이 강조됐다.
- 최근 한국에서는 소액주주들뿐만 아니라 행동주의 펀드들이 적극적으로 투자기업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최근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의 적극적인 행동을 지켜봤다. 이는 분명히 주주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영향을 미쳤다. 또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으로 기관투자자들이 투자기업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례도 늘어났다. 이런 사례들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코리아디스카운트 문제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좋은 기업지배구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기업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주, 이사, 경영진 및 직원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잘 조정해야 한다. 특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강력한 이사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회가 단순히 경영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진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만 훌륭한 기업지배구조의 기초가 될 수 있다.
- CG Watch보고서는 2년마다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곧 새로운 보고서가 나올 때가 됐는데 다음 보고서에서는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볼 것인지 궁금하다
▲새로운 CG Watch 보고서는 내년부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새로운 보고서에서는 지난 보고서에서 우리가 지적한 내용을 한국이 잘 개선했는지를 볼 것이다. 가령 차등의결권 도입문제라든가, ESG의무보고를 앞당길 수 있는지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