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부양을 위해 너도 나도 자사주 매입에 뛰어들었던 상장사들이 올해 들어 신탁계약을 잇달아 해지하고 있다. 최근 주가가 반등세를 보인 가운데 기존에 취득한 자사주를 활용해 차익실현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3일 금융감독원 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22일까지 상장사 자사주 신탁계약 해지 공시 건수는 총 124건이다. 코스피 31건, 코스닥 93건이다. 작년 같은 기간 동안 63건(10건+53건)에 비해 2배 가까이 더 많다.
이달 들어서도 17개사가 해지했다. 지난 12일에는 SM엔터테인먼트(종목명 에스엠)가 신한투자증권과 체결한 100억원 규모의 신탁계약을 해지했다. SM은 계약기간 동안 목표금액의 91%인 91억원을 취득한 바 있다.
이밖에 형지엘리트(이하 신탁계약금액 10억원·취득비율 98%), 유니퀘스트(10억원·99%), 네오위즈(100억원·99%), 제룡산업(30억원·95%), 아이티엠반도체(50억원·98%) 등이다.
상장사가 택할 수 있는 자사주 취득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직접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거나, 혹은 신탁계약을 맺은 증권사에 현금을 맡기고 간접적으로 취득할 수 있다. 나중에 신탁계약을 해지하면 증권사로부터 주식을 돌려받아 회사가 직접 보유할 수 있다.
신탁계약을 통한 간접취득은 직접취득과 비교해 규제 문턱이 낮다. 신탁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간접취득의 경우 직접취득과 다르게 반드시 목표수량만큼 자사주를 매입하지 않아도 된다. 또 신탁계약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선 직접취득보다 재정 운영에 부담이 덜 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투자자에게는 실제 회사의 취득 시점이나 수량 등을 알기 어렵다.
신탁계약 해지가 늘어난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는 증시가 부진했던 지난 2년동안 여러 상장사들이 자사주 매입에 나선 점 역시 꼽힌다. 유동성 위축으로 주가가 지난한 흐름을 보이자 주가를 띄우기 위한 조치였다. 통상 자사주 매입은 회사가 시장에 미래 성장성을 약속하는 행위인 동시에 유통주식 물량을 줄여 주가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간접취득에 집중됐다. 한국거래소에 신고된 자사주 취득은 총 838건인데 이중 간접취득이 530건으로 63%에 이르는 수준이다.
경기침체 공포에 휩싸여 지수가 급락세를 보였던 작년 3분기에는 간접취득 공시는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2분기 직접취득과 간접취득은 각 20건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2022년 3분기 기준으론 직접취득이 46건으로 2.3배 증가한 한편, 간접취득은 94건으로 4.7배 늘었다.
간접취득으로 실제 주식을 취득한 비율은 목표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가 신탁계약을 해지하면 증권사가 갖고있던 주식은 회사 계정으로 들어와 직접 취득 형태로 보유하게 된다. 회사는 자사주를 쭉 보유할 수도 있지만, 이를 시장에 팔거나 아예 소각 처리할 수 있다.
2020년 이후 해지된 신탁계약의 실취득률은 평균 84%를 기록했다. 강소현 자본시장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직접취득의 경우 강제적으로 공시한 주식 수를 전량 취득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시장 상황이 급변하거나 유동성이 급격히 하락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공시된 규모만큼 취득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며 "그러나 간접취득의 경우 취득 강제성이 없어 기업은 취득 규모를 재량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요새 잦아진 자사주 신탁계약 해지에 대해 회사의 자사주 처분 시그널로 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하반기 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전망이라 자사주를 팔아 현금을 비축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분기보고서 제출 이후인 5월 하순부터 6월까지는 이슈가 없기 때문에 주가가 밀릴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며 "신탁계약을 해지하면 회사 입장에선 쓸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셈"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