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운용업계가 지난달 퇴직연금 시장을 겨냥한 밸런스펀드(BF, Balanced Fund)의 일종인 '디딤펀드'를 대거 선보였다.
25개 자산운용사가 새 상품을 출시하거나 기존 상품을 리뉴얼해 '디딤' 브랜드를 달고 상품을 내놓았다.
디딤펀드는 원리금보장형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 위주의 시장에서 중간단계인 중위험·중수익 펀드를 추구하는 상품이이다. 쉽게 말해 퇴직연금 운용에서 원금보장이 중요한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지만, 어느정도의 수익은 추구하고 싶은 투자자를 겨냥한다.
향후 디딤펀드의 성공 여부는 디폴트옵션 승인 여부와 은행권 취급 규모에 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디딤펀드 첫선…중위험·중수익 타깃
현재 퇴직연금 시장에는 실적배당상품과 원리금보장상품이 있다. 디딤펀드는 실적배당상품에 속한다. 실적배당상품은 투자한 상품의 실적에 따라 고수익을 얻을 수도 있고 손실을 볼 수도 있다. 반면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하면 예적금처럼 원금에 소정의 이자를 더해 돌려받게 된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에서 실적배당형 영역은 상장지수펀드(ETF)와 타깃데이티드펀드(TDF)가 장악하고 있다. 금투협 관계자는 "가입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퇴직연금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BF인 디딤펀드를 계획, 출시했다"고 말했다.
연금에 특화한 자산배분 펀드에는 TDF와 BF가 있다. TDF는 근로자의 은퇴 시점을 목표로 운용 기간에 따라 위험자산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운용한다. 가입 초기에는 변동성이 높은 주식의 비중이 높고 은퇴 시점이 다가올수록 안전 자산인 채권의 비율이 높아진다.
BF는 위험자산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형태다. 투자자가 사전에 선택한 위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금융시장 상황과 펀드내 자산가치 비중 등을 고려해 자산 비중을 유연히 조절(리밸런싱)한다.
금융투자협회는 BF 활성화를 위해 지난해 4월부터 업계 공동브랜드 '디딤펀드'를 계획, 지난달 첫선을 보였다. 자산배분전략을 통해 중위험·중수익을 목표로 한다. 미래에셋·삼성자산운용 등 국내 24개 자산운용사는 지난달 25일부터 디딤펀드 판매를 시작했고, 대신자산운용도 10월 중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금투협회장이 직접 지은 '디딤' 의미는
디딤펀드 이름인 '디딤'은 서유석 금투협 회장이 직접 지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원리금보장형 상품 적립금이 333조원으로 전체 적립금의 87.8%를 차지한다. 실적배당형은 49조원으로 12.8%에 불과하다.
원리금보장 상품은 특히 저금리 시기의 수익률이 물가 상승률에 못 미친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이에 서유석 회장은 퇴직연금 적립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리금보장 상품 투자자가 고위험·고수익 상품인 실적배당형으로 가기 전 '디딤돌 역할을 하는 펀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아 디딤펀드의 이름을 지었다.
금투협 관계자는 "디딤펀드는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수익률을 목표로 한다"며 "다른 실적배당형 상품보다 다소 낮은 위험 수준으로 투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투협이 제시한 디딤펀드의 조건은 △자산배분전략 활용 △펀드 이름에 '디딤' 포함 △퇴직연금에 100% 투자 가능할 것 △1 운용사당 1개 상품 출시 등이다.
먼저 디딤펀드는 장기 연금투자에 효과적 방법인 자산배분전략을 활용한다. 투자위험이 서로 다른 다양한 자산에 분산투자하고 시장상황, 자산가치 변동을 고려해 주기적으로 자산배분을 조정한다.
퇴직연금 적립금 전액을 투자할 수 있는 상품이다. 퇴직연금 적립액의 100%를 투자하기 위해서는 △주식편입 비중이 50% 이하 △투자부적격채권 편입한도 30% 이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보통 신용등급 BB 이하의 펀드를 투자부적격채권(투기등급)으로 본다.
'디딤'이란 이름을 담은 펀드는 각 운용사별로 단 하나의 상품만 출시한다. 운용사의 역량을 집중하는 동시에 소비자의 선택 편의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금투협 관계자는 "펀드 이름에 TDF가 들어가면 퇴직연금용 상품인 것을 인지하는 것처럼 '디딤'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마케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사상품 있는데 굳이?... TDF와 원리금보장 사이 '메기'
디딤펀드를 운용하는 25개 자산운용사 중 15개는 새롭게 펀드를 출시했고, 10개사는 디딤펀드와 유사한 기존 BF펀드를 리뉴얼해 선보였다.
금투협 관계자에 따르면 처음 디딤펀드에 대한 자산운용사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 디딤펀드를 논의할 당시 '비슷한 상품이 이미 있는데 왜 또 내야 하느냐' 혹은 '이미 비슷한 상품을 운용해 봤지만 수익이 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디딤'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마케팅해 TDF에 대항하는 '메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일부 운용사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면서 디딤펀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소비자물가상승률에 4.5% 추가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펀드(한국투자 디딤CPI+펀드)를 기획, 출시했다. '퇴직연금 선진국'으로 불리는 호주의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상품(MySuper)을 벤치마킹했다.
한투운용은 이미 소비자물가상승률에 3.0% 추가 수익을 추구하는 '한국투자MySuper알아서안정형'과 6%의 초과 수익률을 추구하는 '한국투자Mysuper알아서성장형' 펀드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소비자물가상승률에 4.5% 추가 수익을 추구하는 '디딤펀드'를 새로 낸 것이다. 한투운용 관계자는 "밸런스 펀드 중에서도 타깃 수익률을 다양화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혔다"고 강조했다.
운용사 1개당 하나의 상품만 출시하는 조건을 적극 활용해 대형 운용사와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아보겠다는 포부도 엿보였다. 흥국자산운용 관계자는 "'흥국디딤연금플러스증권자투자신탁'은 전세계 모든 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하는 ETF에 주로 투자한다"며 "운용사 당 1개의 디딤펀드를 출시하는 만큼,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디딤펀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미래에셋운용(미래에셋디딤올웨더TRF), 삼성자산운용(삼성디딤밀당다람쥐 글로벌EMP) 등 대형운용사도 신규 상품으로 선을 보였다.
최재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디딤펀드는 자산배분전략을 통해 중장기 수익을 추구하는 연기금형 자산배분펀드"라며 "투자 초기 공격적인 자산 배분을 하는 타깃데이티트펀드(TDF)와 원리금 보장형 상품 사이의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직 은행 판매 소수...디폴트옵션 승인도 관건
다만 실제 디딤펀드 활성화 여부는 은행권이 디딤펀드를 취급하는지에 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디딤펀드는 출시일 기준 14개 증권퇴직연금사업자를 통해 담을 수 있다.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신한투자증권, NH투자증권 등이다.
은행에서는 아직 디딤펀드 취급율이 낮다. 하나은행, NH농협은행에서는 아직 디딤펀드를 담을 수 없다. 우리은행에서는 계열사 우리자산운용에서 선보인 '우리디딤미국테크와바이오'만 취급하고 있다.
신한은행에서는 계열사인 신한자산운용의 '신한 디딤글로벌EMP'과 기존 상품을 리뉴얼한 △트러스톤디딤백년50EMP자산배분 △키움디딤더높이EMP을 취급한다. KB국민은행에서도 기존 상품을 리뉴얼한 상품만 2건 다루고 있고, NH농협은행은 10월 중으로 계열사 'NH-Amundi디딤하나로'을 라인업할 예정이다.
또다른 관건은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승인 여부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7월 사전지정운용(디폴트 옵션) 제도를 도입해 수익률 제고를 유도하고 있다. 디딤펀드가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으로 승인돼야 은행 창구로부터 자금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는 평가다.
결국 디딤펀드 수익률이 중요하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은행에서 디딤펀드를 취급하지 않는다면 디딤펀드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면서도 "수익률이 증가하고 국민 관심도가 늘면 디폴트옵션 적용도 가능해지면서 은행권에서도 디딤펀드를 취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