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과 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생산적 금융'을 거듭 강조하는 가운데 증권업계에서는 발행어음이 자본 공급의 핵심 수단 중 하나로 거론된다. 기존 발행어음 사업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신규 사업자들의 잇따른 진입으로 발행어음 시장 규모는 최대 120조원대까지 커질 전망이다.
모험자본 범위 확대, 위험가중자산(RWA) 규제 완화 검토 등 당국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조달금리, 수익률 부문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도 60%만 쓴 증권사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한국투자증권, KB증권,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등 4개 사업자의 발행어음 잔고는 74조656억원이다.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증권사는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 별도 자기자본의 최대 200%까지 발행어음을 발행할 수 있다. 법인이나 개인이 CMA나 퇴직연금 계좌를 통해 발행어음을 매입하면, 증권사는 이 돈을 채권·주식·부동산·주가연계증권(ELS) 등으로 운용한 뒤 투자자에게 원금에 약정 수익률을 붙여 돌려주고 나머지 수익률을 챙길 수 있다.
초대형 IB 1호 사업자인 한국투자증권이 2017년 처음 판매를 시작한 이후 8년이 흘러 전체 시장 규모는 40조원대에 이른다. 하지만 이 수치는 전체 발행 한도의 약 60% 수준에 그친다. 4개사의 별도 자기자본 합계는 약 37조원으로 이들이 찍어낼 수 있는 발행어음 한도는 최대 74조원까지 설정돼 있다.
증권사들마다 발행어음 활용도에 차이를 보인다. 가장 공격적으로 발행어음을 운용하고 있는 곳은 한국투자증권이다. 이 회사의 발행어음 잔고는 17조3636억원으로 4개사 중 압도적으로 많다. 이에 따라 자기자본 대비 발행어음 잔고 비율은 올해 1분기 말 171%까지 치솟았다가, 한국금융지주의 자본 확충 지원 등으로 자기자본이 늘면서 3분기 말에는 144%로 낮아졌다.
KB증권 역시 적극적인 편에 속한다. 2분기부터 잔고가 10조원을 넘어서며 자기자본 대비 비율이 166%까지 상승했다. 반면 NH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은 발행어음 잔고가 7조원대에 불과하다. NH투자증권은 자기자본 대비 발행 비중이 103%이며 미래에셋증권의 경우엔 잔고가 자기자본에도 미치지 못한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운용 역량과 경영 전략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은행계, 비은행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비즈니스 모델로 성장하느냐에 따른 전략의 차이"라며 "한국투자증권은 자금을 조달해 IB 딜에서 확보한 자산으로 운용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뒀기에 자신있게 발행을 하는 반면, 미래에셋증권은 브로커리지나 고유자금운용(PI) 역량 강화에 무게를 둔 탓에 발행어음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 아래 부상하는 발행어음 역할론
그러나 올해부턴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키움증권에 이어 하나증권과 신한투자증권이 차례로 초대형 IB로 지정을 받으며 발행어음 신규 인가를 받았다. 당국이 증권사에 발행어음 신규 인가를 내준 건 지난 2021년 미래에셋증권 이후 4년 만이다. 이에 따라 발행어음 사업자는 기존 4곳에서 7곳으로 늘어났다.
새로 진입한 세 증권사의 자기자본을 감안하면 발행어음 시장의 총 한도는 기존 74조원에서 109조원까지 확대된다. 현재 인가 심사를 받고 있는 삼성증권과 메리츠증권까지 추가로 진입할 경우 시장 규모는 12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관건은 늘어난 한도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다. 정부는 생산적 금융의 한 축으로 증권업계에 자금공급 역할을 부여해 둔 상태다. 금융당국은 지난 4월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제도개선을 통해 증권사가 발행어음·종합투자계좌(IMA) 조달액의 25%에 달하는 규모 자금을 모험자본에 투입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지난 8월 발행어음 사업자인 4개 증권사 자금운용 부문 임원들을 소집해 직접 투자 확대를 주문한 바 있다.
이후 미래에셋증권 6조원, 메리츠금융지주 5조원, 키움증권 3조원 등 자금 공급을 약속했으며 NH투자증권은 중소, 중견기업 대상으로 3150억원의 투자를 집행했다. 은행지주가 아닌 미래에셋그룹의 박현주 회장을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공동위원장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이같은 정부의 기대감에 업계도 기조를 맞추는 분위기다. 실제로 비교적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던 미래에셋증권에서는 IMA 인가를 계기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최근 IB 딜 소싱 강화를 위해 주식발행시장(ECM)·채권발행시장(DCM)은 물론 인수금융, 유동화 딜, 프리IPO 등 기업금융 심사 인력 채용에 나섰다.
여기에 은행지주 산하 증권사들를 제약해온 RWA 규제 완화 소식도 투자 여력을 높이는 요소다. 현재 금융위원회는 금융회사 전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투자자예탁금을 RWA에서 제외하는 내용등을 포함한 제도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이다. BIS 비율은 자기자본 대비 RWA 비중으로, RWA가 늘어날수록 해당 비율이 하락한다. 은행뿐 아니라 증권, 저축은행, 캐피탈 등 비은행 계열사의 투자자산까지 지주 RWA에 포함되는 탓에 은행지주 계열 증권사들이 투자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은행지주 계열사 관계자는 "지주의 기준으로 맞추다보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안정적인 자산으로만 투자를 해서 비율을 맞춰야 한다"며 "그러다 보면 발행어음이나 IMA 제도가 정부가 강조하는 모험자본 투자 취지에서 빗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동산 투자 비중 제한 등이 이미 설정돼 있는 만큼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익률 경쟁 치열할 듯…리스크관리 시험대
신규 사업자들의 등장과 정부의 강한 드라이브 속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양질의 투자처를 발굴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생산적 금융의 취지에 맞게 A등급 이상의 채권에만 투자가 쏠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투자위험 관리가 필요하다는 관측이다.
김대현 S&P글로벌 아태지역 금융기관 신용평가 담당 상무는 "모험자본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수익성과 안정성을 모두 갖춘 딜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며 "그러다보니 수익률 경쟁이 심화될 수 있고, 발행어음은 단기로 조달해 장기로 운용하는 구조인 만큼 만기 불일치 리스크 발생 가능성도 모니터링 대상"이라고 말했다.
국내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증권사들은 신용등급이 높아 조달금리가 낮은 편"이라며 "중위험 자산에 투자하더라도 마진을 확보할 수 있지만, 경쟁때문에 무리한 고위험 투자에 나설 경우 장기적으로는 손실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