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트윈' 기술이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생산에 이르는 의약품 개발 전 주기에 효율성을 개선하는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의 사물이나 프로세스(작업 과정)를 가상 공간에 구현, 실시간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을 통해 그 성능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의약품 생산도 '시뮬레이션'
25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달부터 가동에 들어간 바이오의약품 생산 5공장에 디지털트윈 기술을 접목했다. 의약품 생산에 쓰이는 바이오리액터(생물반응기)에 컴퓨터를 활용해 유체의 흐름을 예측하는 CFD(전산 유체 역학) 시스템을 통합한 것이 핵심이다.
바이오리액터는 세포를 배양하는 일종의 '세포 공장 탱크'다. 이 안에는 세포와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아미노산, 비타민 등의 영양분(배양액)이 포함돼 있다. 바이오리액터의 세포 배양 환경은 최종 생산된 의약품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디지털트윈 기술을 도입한 이유는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통해 세포배양 결과를 예측하고 발생 가능한 위험에 선제 대응할 수 있어서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4공장 바이오리액터에 적용한 CFD 모델로 확인한 예측값은 실제 공정 데이터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95%의 동등성을 나타냈다.
CFD 분석으로 얻은 데이터를 활용하면 전체 의약품 생산 공정 시나리오를 설계하고 생산성, 품질 등을 고려한 최적의 공정 조건을 도출할 수도 있다. 의약품 생산 초기 단계에 디지털트윈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공정 최적화와 운영 효율성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통 제약사 중에는 종근당이 이러한 디지털트윈 기술을 의약품 생산성과 품질 개선에 활용하고 있다. 종근당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달리 의약품 생산 공장을 통째로 가상환경에 옮기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종근당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월드IT쇼 2024에서 천안공장과 동일한 쌍둥이 공장을 가상 공간에 구축한 '메타버스 팩토리'를 선보였다. 작업자가 어디서든 실제 생산현장과 동일한 수준의 생산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정상 위험 요소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생산뿐 아니라 개발도
디지털트윈은 의약품 생산뿐만 아니라 신약 후보물질 발굴과 동물실험, 임상시험 등 의약품 개발 전 과정에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계 생명공학기업인 딥라이프는 약물의 약효를 평가할 수 있는 인간 세포 기반의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개발했다. 올해 1월 딥라이프는 프랑스 국립보건의료연구원과 간모세포암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협약을 맺었다. 딥라이프의 암세포 디지털트윈 모델을 활용해 약물을 개발하는 내용이다.
미국의 바이오기업 언런은 의약품 임상시험을 위한 디지털트윈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 환자와 통계적으로 유사한 가상환자를 생성해 약물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환자를 사전에 선별하거나, 시험 대조군의 규모를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언런은 이달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알츠하이머 학회에서 디지털트윈 기술을 접목한 임상연구를 발표했다. 벨기에 바이오기업 레마인드가 소규모로 진행한 알츠하이머 치료제 임상 2상 시험에서 가상 대조군을 생성해 실제 환자들의 반응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오프리메드가 디지털트윈을 활용한 임상시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오프리메드는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AI) 기반의 휴먼 디지털트윈 모델 '옵티비스'를 개발했다. 성능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양인 가상환자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외 기업과 차별점을 지닌다.
글로벌 규제기관들 도입 장려
디지털트윈 기술은 사람에게 약물을 투여하기 전 악효나 안전성을 평가하기 위해 시행하는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갖추고 있다. 사람보다 생물학적 구조가 단순한 동물을 디지털트윈으로 생성해 약효 등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 등 글로벌 규제기관은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디지털트윈 기술 도입을 장려하고 있다.
지난 2022년 유럽의약품청에 이어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국은 언런의 디지털트윈 기반 통계 분석 방법론을 임상 2, 3상 시험의 주요 분석방법으로 쓸 수 있도록 승인했다. FDA는 2017년 CFD 모델링에 대한 일반적인 권장사항이 담긴 보고서를, 2023년에는 의료기기 분야에서 CFD를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디지털트윈 기술을 임상시험 등의 의약품 개발 과정에 도입하고자 하는 규제기관 방향성은 명확하다"며 "FDA는 동물실험을 대체하려는 기조에 따라 임상시험에서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디지털트윈은 이를 위한 대안 중 하나로 몇 년 내로 공식적인 도입이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