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부재로 경영 위기에 몰린 그룹들이 ‘위원회’체제를 대안으로 꺼내들었다. 재계3위 SK에 이어 10위인 한화, 14위인 CJ까지 비상경영체제로 위원회 방식을 도입했다.
CJ그룹은 오너 일가가 포함된 ‘그룹 경영위원회’로 총수 공백을 메우기로 했다. CJ는 타사와 달리 오너 일가가 참여해 위원회 의사결정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를 갖췄다. 앞서 SK그룹은 지난 2월 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를 비롯해 6개 위원회를 만들었다. 계열사 CEO들이 각 위원회를 나눠 맡는다. 한화그룹도 지난 4월 비상경영위원회를 출범했다. 그룹 원로들이 한 파트씩 책임지는 방식이다.
이들 회사는 위원회체제 도입 이유를 총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속내는 총수의 권위는 살려둔 채 현상유지를 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누구도 독박을 쓰지 않겠다는 셈법 또한 작용하고 있다.
위원회 조직은 행정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독단과 전횡으로 흐를 수 있는 독임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장치다.
위원회 조직의 장점은 ①다양한 경험과 전문지식을 활용해 의사결정을 공정하게 할 수 있고 ②여러 사람이 참여하므로 보다 많은 사람의 만족과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단점은 ①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므로 의사 결정의 신속성을 기대할 수 없고 ②책임의식이 희박해 타협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새 상품이 쏟아지고 트렌드가 바뀌는 세상에서는 스피드 경영이 절실하다.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거대하지만 빠른 조직’을 삼성의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판단이 빨라야하고 의사결정이 내려지면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것 또한 빨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위원회 방식은 한계를 안고 있다. 대규모 투자나 해외 진출 등 굵직한 결정을 내릴 때 그런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원회 멤버들은 투자 적격성을 따질 때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크게 본다.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보다는 리스크 헤징(위험 회피)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SK의 하이닉스 인수나 CJ의 대한통운 인수와 같은 굵직한 딜은 어려워진다.
해외사업은 파트너와의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손을 잡는다. 특히 신흥국은 오너의 정관계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키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화의 이라크 국민주택단지(9조원 규모) 수주 역시 김승연 회장의 네트워크가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총수 공백을 대체하는 경영체제로는 위원회보다 전문경영인이 낫다고 할 수 있다. 총수가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힘을 실어준다면 오너체제의 장점도 살릴 수 있다.
총수 공백이 단기간에 끝난다면 원포인트 릴리프(한두 타자만 상대하는 구원투수)를 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선발투수에 버금가는 셋업맨(7~8회를 막아주는 구원투수) 정도는 기용해야 한다. 이 또한 총수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