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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관치를 깨웠다

  • 2014.02.03(월) 11:58

신용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책임 소재 가리기가 일사천리다. 어느 때보다 속전속결 양상이다. 개인정보가 여러 형태로 사고 팔린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번 사고가 확인되기 전에도 현대캐피탈, 한국씨티은행, 한국SC은행이 비슷한 사고를 냈다.

은행과 카드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질병이나 수술 정보 등이 담긴 보험사 고객정보도 줄줄이 샌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증권사의 고객정보도 상황은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핸드폰을 살 때는 물론이고 차에 기름 넣을 때 만든 정유카드, 홈쇼핑에선 물건 사면서 알려준 카드 번호가 어떻게 돌아다니는지도 의혹을 받는다.

이런 막연한 불안이 실제로 확인되자 국민의 불안감은 빠르게 최고치로 치고 올라갔다. ‘문제는 터져야 문제’라는 말처럼 이번 실제 상황은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전 국민의 불안은 금융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금융감독당국에도 적잖은 충격을 줬다. 정치권도 한마디씩 거들었고, 급기야 해외 순방일정을 소화하던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는 상황을 만들었다.

▲ 지난 1월 20일 오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사상 최대 고객정보 유출 사고를 낸 국민·농협·롯데카드사 대표들이 사과 및 피해대응방안 기자회견에 앞서 사과인사를 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qwe123@

이것은 문제를 차분히 해결하는 것보다 ‘단죄’를 서두르는 계기가 됐다. 급기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감독당국은 이번에 사고를 낸 국민•롯데•농협카드의 영업을 3개월간 정지하기로 사실상 확정했다. 이 같은 결정은 오늘(3일) 각 카드사에 통지하기로 했다.

통상적인 제재 절차는 완전히 무시됐다. 보통 금융회사에 대한 제재는 금융감독원이 해당 금융회사를 검사한 뒤 검사보고서가 나오고, 적정한 제재 수위를 제출해 금융감독원의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친다. 제재심은 금융감독원장의 자문기구다. 현재 민간위원 6명, 정부 측 위원 3명 등 9명으로 구성해 있다.

제재심은 법률적으론 자문기구여서 엄밀하게 얘기한다면 꼭 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금융회사에 대한 제재는 행정조치이고 이 행정조치의 권한은 심의•의결기구인 금융위원회의 몫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금융감독 및 정책 섹터를 기존 옛 재정경제부에서 독립시킨 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으면서부터다. 이때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금융감독 부문을 정부와 분리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말이 권고지 달러 지원에 따른 이행조건이기는 했다.

그래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권고의 취지 또한 분명하다.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는 금융감독이 결국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의 리스크를 키운다는 이유였다. 금융 부문은 시스템 리스크를 수반하고 있기에 어느 부문보다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이 말은 관치 금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제재심은 금융감독원의 자문기구에 불과하지만, 형식적인 절차를 세분화하고 여기에서 결정이 불문율처럼 인정된 것은 이런 공감대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이것이 깡그리 무너졌다.

이런 절차가 지켜지면 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관치는 항상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관치가 전혀 없어야 좋다는 얘기도 아니다. 돈을 벌려는 기업의 마케팅 진화를 법률이 모두 따라가기는 사실상 어렵다. 규제가 적으면 산업이 발전한다는 얘기는 결국 약간의 편법을 용인해 기업의 먹거리를 보장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번엔 최소한의 절차도 무시됐다. 금감원은 다음 주중 이와 관련한 제재심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이번 사고에 대해, 그것도 이미 ‘3개월 영업정지’라는 구체적인 정부의 생각과 의지를 언론을 통해 공개한 이후에 열리는 제재심에서 6명의 민간위원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여론재판이다. 법률이 정하고 있지 않은 제재 수위를 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제재 수위는 정당한 범위 내에 있지만,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은 이번 제재를 정치적으로 풀고 있다. 정치적 여론몰이로 제재의 수위를 강제하고 있다. 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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