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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학(帝王學)과 조현아

  • 2014.12.16(화) 16:20

국가건 기업이건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건 고금의 진리다.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이뤄낸 창업의 열정도 시간이 가면 식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창업자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후손이 흔치 않다는 것도 수성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에서 세종이나 영·정조는 예외적 인물이다. 대다수 임금들은 평균적 능력 이상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제왕학(帝王學)’이다. 임금을 임금답게 만드는 학습체계를 제도화 한 것이다.

 

기업도 부의 대물림을 위해서는 재벌가 나름의 제왕학이 필요하다. 경영학의 대가들은 “기업 총수들이 자녀에게 경영을 승계하려면 지분만 물려줄 게 아니라 기업의 존재 목적과 경영 철학, 기업가가 지녀야 할 품성과 덕목 등을 같이 물려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기업가 정신이란 얘기다.

 

이른바 ‘땅콩 회항’사건은 후계 교육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은 나이 마흔에 무소불위의 경영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을 기업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쓰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기업의 존재 이유가 임직원과 주주, 고객들의 행복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과연 직원에게 모멸감을 주고 소비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했을까. 대한항공의 경영이념인 ‘고객 최우선 경영’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면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되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조 전 부사장의 일탈에 대해 “애비가 잘못 가르친 탓”이라고 했다. 경영 승계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않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재벌가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외고→해외 명문대→MBA 등 엘리트 코스를 거친다. 경영과 관련해서는 경영학자 못지않은 스펙을 갖추는 셈이다. 하지만 스펙뿐인 이들이 적잖다. 이들에게는 미생의 ‘장그래’ 같이 을의 입장이나 밑바닥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우왕좌왕한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커왔고 매뉴얼대로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지도에 없는 길은 아예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외눈박이 경영을 막기 위해서는 현장 경험을 풍부하게 경험시키는 게 중요하다. 평사원은 평균 22년이 넘어야 임원이 되지만 재벌가 자녀들은 3년 만에 별을 단다. 이런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는 산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 회사가 정한 직급을 밟아가면서 동료들과 애환을 나눠야 승진이 뭔지 조직문화가 뭔지 안다. 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수행해 봐야 성공했을 때의 자긍심과 실패했을 때는 도전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경영이론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폭넓게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주는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을 만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로운 사람과 해로운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대인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터득하게 된다.

하지만 재벌가 부모들이 다양한 학습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네트워크 역량과 실무 감각까지 갖춰 주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자녀의 경영 의지가 박약하다면 헛수고일 뿐이다. 제아무리 제왕학을 가르쳐도 연산군과 같은 폭군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경영을 해야 할 2세와 하지 않을 2세, 해서는 안될 2세를 가려내 수성에 성공하는 것까지 기업인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이제 재벌가도 지금처럼 자녀에게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물려줄 것인지, 소유권만 물려주고 경영은 외부에 맡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왕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왕이 될 수는 있지만 추앙 받는 군주가 되기는 어렵다. 성군을 낸다는 건 왕조를 이어가야 하는 왕실 입장에서는 축복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왕조는 창업 때부터 왕자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제왕학의 체계를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조선의 왕자는 보양청(輔養廳 : 유아기)→강학청(講學廳 : 유년기)→시강원(侍講院 : 세자)을 통해 길러졌다. 세자는 3정승을 사부로 삼고 학식이 뛰어난 관료를 스승으로 삼아 하루에 세 차례(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 교육을 받았다. 강의 과목은 사서삼경을 비롯해 치세술의 경전으로 꼽히는 정관정요, 역사서인 자치통감 등이 망라됐다.


제왕학은 임금의 정치리더십을 높이는 학문체계다. 임금은 학습을 통해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현실 정치에 구현해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을 최고 덕목으로 삼았다. 조선 왕조의 경우 성리학적 질서인 군위신강(君爲臣綱 :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게 근본이다)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등 삼강오륜의 섭리가 작동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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