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계에 '3세 경영' 시대가 열리고 있다. 창업주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경제 근대화의 씨를 뿌렸고 2세들은 이를 이어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3세들의 임무는 막중하다. 저성장 환경에서 수성하기가 녹록지 않을 뿐더러 경쟁자는 갈수록 많아지고 승부는 더욱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삼성과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사업구조 개편과 합병을 통해 3세 경영을 위한 물밑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달 치러질 주요 기업들 주총에서도 오너들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이슈들이 예고되고 있다. 비즈니스워치는 '승계 방정식' 기획시리즈를 통해 국내 주요 그룹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너 일가의 경영권 승계 문제와 그룹별 사업재편 전망, 이와 관련한 변수와 시각을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편집자]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재벌가 3세가 경영 전면에 속속 나서고 있다. 한진그룹은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을 지주회사인 한진칼 등기임원으로 선임할 예정이고, 효성그룹의 조현상 효성 부사장도 큰형과 함께 등기이사직을 맡는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현대제철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방식으로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에게 길을 터줬다.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큰 변화도 진행중이다. 삼성그룹은 계열사간 복잡한 지분관계 정리와 사업 재조정에 나섰다. 지난해 삼성에버랜드에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을 합쳤고 삼성SDS와 삼성SNS의 합병을 끝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엠코의 합병을 추진 중이다.
경영전면에 부상한 3세들과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결국 승계 문제로 귀결된다.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물려주느냐는 기업하는 이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삼성을 옳게 계승시키는 일은 촌시(寸時)도 나의 뇌리를 떠난 일이 없다"며 승계작업의 중요성과 이에 관한 오너의 고민을 언급하기도 했다.
외부 환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변수다.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목적으로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짜고, 특정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며 부(富)를 물려주는 기존의 방식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정부도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지주회사 전환을 독려해 재계의 고민은 예전에 비해 한층 깊어지고 있다.
◇ 30대초 임원 달고 40대엔 사장님
승계작업은 경영수업부터 시작한다. 미성년자인 어린 자녀에게 일찍부터 지분을 넘겨주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로 보기는 어렵다. 재벌 총수들은 자녀가 20대나 30대 초반이 되면 회사로 불러들여 경영능력을 키우도록 한다.
경영수업 시작 시기는 다양하다. 이재용·이부진·이서현 등 삼성가 3세는 20대에 삼성에 들어와 30대 초반에는 모두 임원을 달았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24세에 현대차에 입사해 유학생활을 한 뒤 33세에 임원에 오르는 코스를 밟았다. 조현아·조원태·조현민 등 한진가 3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반면 SK와 롯데, 동부, 효성은 30세를 전후해서야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시작한 사례에 속한다. 특히 롯데와 효성은 아버지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몇년이 흘러 경영수업에 들어가는 코스를 택했다. 두산은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해 박용성·박용현·박용만 회장은 은행이나 병원에서 '남의 밥'을 먹어본 뒤 그룹에 들어왔으나 박진원·박석원 등 두산가 4세에 이르러선 이 같은 전통이 깨졌다. LG와 GS는 평사원으로 들어와 그룹내 밑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도록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3세들의 경영수업 기간은 얼마나될까. 경제개혁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국내 20대 그룹 2~3세들의 평균 입사연령은 27세로 이들은 34세에 등기이사를 맡고 42세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기업의 임원으로서 법률적 책임을 질 때까지는 7년, 최고경영자(CEO)로서 자신의 성과를 보이기까지는 15년이 걸린 셈이다.
◇ 장남 중심 승계..삼성·한진은 여풍당당
형제간 지분차이는 승계를 둘러싼 서열이 반영돼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지분을 들고있는지를 보면 향후 그룹 승계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 주요 그룹들은 아들, 그 중에서도 장자 중심의 승계구도가 일반적이다.
형제간 공동경영을 하는 두산도 지분만 보면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 일가가 다른 형제들보다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LG는 구본무 회장이 구광모 LG전자 부장을 양자로 입양해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구 부장은 구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LG는 장손 중심의 승계구도를 짰다.
삼성과 현대는 창업주가 굳이 장남을 고집하진 않았지만 아들이 하나뿐인 3세에 이르러선 자연스럽게 장남 중심의 승계가 이뤄지고 있다. SK그룹은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을 이어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경영을 맡았고, 최종현 회장 사망 뒤 그의 장남인 최태원 현 SK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았다.
롯데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 부회장과 그의 동생인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의 지분 차이가 크지 않다. 한진그룹도 조원태 부사장과 그 누나인 조현아 부사장, 동생인 조현민 전무는 지분차이가 거의 없다.
딸들의 경영참여를 인정하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곳으로도 나뉜다. 삼성의 이부진·이서현 사장이 호텔신라와 에버랜드, 제일기획 등에서 각자의 사업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고모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도 삼성으로부터 유통부문을 계열분리해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LG와 금호는 딸들의 경영참여가 활발하지 않은 곳으로 꼽힌다. 금호는 딸들의 계열사 지분소유도 금했으나 박찬구 회장의 장녀인 박주형 씨가 이를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