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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CJ의 '묻어둔 화해'

  • 2015.08.21(금) 10:34

[Watchers' Insight]
"미세한 틈이 영원한 이별로"
"사람은 기계보다 빨리 녹슨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나타났던 틈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하게 벌어져갔다. 나는 그것이 결국 영원한 이별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묻어둔 이야기' 275쪽)

고 이맹희(사진) CJ그룹 명예회장이 경기도 여주에 묻혔다. 삼성그룹 장남으로 한때 가업을 잇던 그는 아버지(이병철 선대회장) 눈 밖에 나면서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떠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비운의 황태자’라 불렀다. 그는 1993년 발간한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부자간에 벌어진 ‘미세한 틈’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다고 썼다.

‘비운의 황태자’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졌다. 28년 전 아버지가 투병했던 곳이고, 지금은 아들(이재현 CJ 회장)이 투병하고 있는 곳이다.

1987년 이맹희 명예회장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부지, 그동안 못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이소. 인제 아부지 곁에 있겠심더.”(336쪽). 하지만 이병철 선대회장의 몸은 아들의 사죄를 받지 못할 정도로 쇠락해졌다. “여동생 명희(신세계 회장)가 곁에서 ‘오빠가 그런 소리를 해도 아부지한테는 안 들린다.’”(336쪽)고 했다.

2015년 이재현 회장은 아버지의 관을 쓰다듬으며 오열했다. 방랑했던 아버지를 원망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의 눈물인지 모르겠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그의 아들의 용서를 듣지 못했고, 이맹희 명예회장은 그의 아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지난 20일 열린 영결식에서 오랜 친구(이맹희 명예회장)에 대해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온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 선대회장님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산 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고 추도했다.

 


대를 잇는 비탄의 가정사는 단 한 명에게 허락된 ‘자리’에서 시작됐다. “정상의 권력이 갖는 속성은 얼음장처럼 차디차다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다. 누구든 정상의 위치, 거대한 조직을 끌고 갈 책임을 지면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절대 권력의 속성상 그 정상의 위치에는 단 한 사람밖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266쪽)

“남동생 창희(고 새한미디어 회장)가 아버지를 사직당국에서 조사하라는 천륜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를 만들어서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밀었고”(259쪽), “아버지는 상당 기간 내가 그 일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이 되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262쪽)

결국 그 ‘자리’는 이건희 회장이 앉았다. 그 ‘자리’에서 밀려난 이맹희 명예회장은 해외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운명한 1987년부터 2015년 8월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까지 28년을 해외에서 떠돌았다.

그가 해외서 방랑했던 30여 년간 동생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고, 아들은 CJ그룹을 일구며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반목은 삼성과 CJ를 옭아맸다. 2012년 이맹희 명예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소송을 제기했고, 삼성은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 이맹희 명예회장 측이 ‘한 푼도 안 준다는 탐욕이 소송을 초래했다’고 했고, 이건희 회장은 “이맹희 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할 상대가 아냐, 바로 내 얼굴을 못 보던 양반”이라고 말했다.

작년 초 소송은 취하됐지만, 화해는 없었다. 이건희 회장은 작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려져 지금까지 온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고, 이맹희 명예회장은 이달 14일 운명했다.

화해는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삼대에 걸친 앙금은 쉽게 씻어지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의 자녀 재용·부진·서현은 큰아버지(이맹희 명예회장)의 빈소와 영결식에 참석하며 예의를 갖췄다. 형집행정지 상태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이재현 회장은 삼성가 친인척이 떠난 뒤에야 몰래 아버지 시신 앞에서 울었다. 사촌형제간의 '극적 만남'은 없었다. 이맹희 명예회장이 묻힌 여주시 연하산은 아버지(이병철 선대회장)가 묻힌 용인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두 그룹의 수장 이재현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간에도 ‘미세한 틈’이 생긴 셈이다. 미세한 틈은 시간이 지나면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버린다. 이맹희 명예회장은 22년 전 이렇게 썼다. “기계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녹이 슬고 망가진다. ‘마음’이라는 요소를 가진 사람은 기계보다도 빨리 녹이 슬게 마련이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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