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시장이 늪에 빠졌다. 대규모 전세사기 여파로 '빌라 포비아(공포증)'가 심화하면서 거래량이 줄고 인허가 등 신규 공급도 꺾였다. 팔리지 않는 빌라들이 경매 시장에 쌓이면서 낙찰률만 오르고 있다.
빌라의 여러 역할 중 도시의 '주거 사다리'로서의 기능이 흔들리는 모습이다.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주택 매입, 전세반환보증보험 가입 요건 완화 검토 등에 나선 가운데 빌라 시장이 되살아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매매도 신축도 잠잠…경매만 시끌
최근 빌라 시장은 전세·매매 거래를 비롯해 신규 공급 지표까지 휘청이고 있다. 고금리, 주택 경기 위축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2022년부터 대규모 빌라 전세사기가 잇달아 나타나면서 빌라 선호도가 뚝 떨어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한국부동산원의 주택유형별 매매거래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국 비아파트 거래 비중은 24.2%로 2006년 조사 이래 가장 낮았다. 그 중 다세대·연립 등 빌라의 비중은 2022년 25.5%, 2023년 15.4%, 올 1분기 14.9%로 떨어지고 있다.
단독·다가구도 같은 기간 15.8%, 10.4%, 9.2%로 떨어지고 있다. 특히 대규모 전세사기 문제가 심각했던 인천의 경우 2022년 60.5%에 달했던 비아파트 거래 비중이 2023년 32.5%, 올해 28.1%로 급락했다.
'전세의 월세화' 현상도 가속화 중이다. 부동산 정보제공업체 경제만랩이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분기 수도권 전용면적 60㎡ 이하 빌라의 전월세 거래량은 5만891건이었다. 이 가운데 월세가 2만7510건(54.1%)을 차지해 국토부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1분기 기준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기록했다.
이처럼 빌라 선호도가 급격히 떨어지자 새로 짓지도 않는 것이 통계로 잡힌다. 국토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서울 빌라 인허가 물량은 564가구뿐이었다. 전년 동기(1198가구) 대비 약 53% 감소한 것이다. 수도권 전체로 넓혀도 그렇다. 같은 기간 수도권 빌라 인허가 실적은 1665가구로 지난해 같은 기간(3691가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올 1분기 기준 서울 빌라 착공은 909가구로 전년 동기(1762가구) 대비 48.4%, 수도권 빌라 착공은 1858가구로 전년 동기(3513가구)보다 47.1% 각각 줄었다.
유일하게 거래가 늘어난 곳은 경매 시장이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들이 경매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물량이 많아진 데다 '빌라 포비아' 등으로 유찰이 반복되면서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경·공매 데이터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5월31일 기준 서울 빌라 경매 진행 건수는 1485건으로 전년 동기(888건) 대비 67.2% 늘었다. 빌라 경매 진행 건수는 지난해 9월 908건에서 10월 1268건으로 오른 뒤 꾸준히 1000건대를 유지하고 있다.
4월에도 서울 빌라 경매 진행 건수가 1456건을 기록해 전월(1048건) 대비 408건이 늘었다. 2006년 5월(1475건) 이후 가장 많았으나, 한 달 만에 더 늘어나며 이 기록을 다시 깼다. 5월 서울 빌라 경매 진행 건수는 2006년 1월(1600건) 이후 가장 많은 1486건이었다.
'주거사다리' 어쩌나…앞날은?
다만 최근 거듭된 유찰로 경매 가격이 크게 떨어진 데다, 정부도 전세사기 피해 주택 구제 등에 나서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는 모습이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서울 빌라 경매 낙찰률(진행 건수 대비 낙찰 건수 비율)은 올해 2월 전월 대비 5.1%포인트 내리며 9.8%까지 주저앉았다가 3월 13.6%, 4월 15.0%로 오른 뒤 5월(31일 기준)엔 27.8%까지 뛰었다. 이는 월별 기준으로 2021년 11월(30.7%)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10건의 매물 중 2~3건 정도만 낙찰된 수준이라 높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5월 낙찰률은 전년 동기(8.6%)와 비교하면 3배가 넘게 올랐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주채권자인 HUG가 대항력을 포기하면서 낙찰률이 오른 것으로 풀이된다.
HUG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에게 집주인 대신 보증금을 내어준 뒤 채권 회수를 위해 강제 경매를 신청한다. 그러나 경매 시장에서 해당 물건에 대한 낙찰을 기피하자 보증금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대항력 포기를 선택하고 있다.
매수인이 임차권을 인수하지 않는 조건으로 경매를 진행하는 것이다. 낙찰자는 낙찰금액 외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추가로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아울러 유찰이 거듭되면서 경매가가 떨어지자 투자 수요도 일부 붙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 10차례 이상 경매가 유찰되면서 감정가의 10%도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경매가 진행되기도 했다.
여기에 전세보증반환보험 가입 문턱이 낮아지면 빌라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빌라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주택가격 산정 방식을 합리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공시가격이 떨어지면서 보증 가입이 어려워진 빌라가 늘어난 데 따른 조치다. 그동안 보증 물건의 주택 가격을 산정할 때 사실상 배제했던 감정평가 방식을 활용하되, 감정가를 높게 부풀리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만으론 빌라 시장이 되살아나기 힘들 거란 전망이 나온다. 여전히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대치하는 등 전세사기 포비아를 끊어낼 만한 전환점이 없어서다.
아울러 시장에서 완화를 요구하고 있는 '공시가격 126%'(공시가격 적용 비율 140%·전세가율 90%)의 기준은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시장에선 빌라가 서민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는 만큼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빌라가 전부 역전세, 전세사기 대상이 아닌 데다 아파트 대체제 성향이 강해서 가격이 많이 떨어지면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며 "갭(Gap)도 워낙 커져서 투자자들의 회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이어 "그동안 전세로 남의 돈을 끌어와서 빌라를 짓던 신규공급 구조도 월세화하면서 임대차 시장이 더 안전하게 되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며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단기적으론 공급이 많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서민의 주거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막힌 부분은 뚫어주는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