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월셋방의 주인이 대기업이라면 어떨까요. 적어도 '다음 세입자 구해질 때까지 보증금 못 줘요' 소리는 안 들을 테고요. 고급형 주택이라면 아파트 수준의 커뮤니티시설도 이용할 수 있겠죠.
늘 그렇듯 문제는 '돈'입니다. 이런 기업형 민간임대주택은 임대료가 시세보다 꽤 비싸거든요. 서울에 위치한 한 임대주택은 16.5㎡(5평)짜리 방의 월세가 100만원에 달하는데요. 과연 이 돈 주고 살 만 할까요?
전세 틈 비집고 들어온 '대기업 월세'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의 임대주택 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입니다. 전세 우위였던 국내 임대차 시장의 '월세화'가 가속화하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으로 보여요.
전세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한국에만 있는 임대차 유형입니다. 월세보다 매달 부담하는 비용이 적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서민들이 내 집 마련까지 가는 징검다리로 역할을 톡톡히 해 왔죠.
하지만 대출 금리 인상, 전세 사기 등을 거치면서 전세의 인기가 예전만 못합니다. 무엇보다 2022년 '빌라왕' 사건을 기점으로 대규모 전세 사기 사례가 속속 드러나자 보증금 미반환 공포가 커졌고요.
1~2인가구가 급증하면서 소형 주택에 월세로 단기 거주하는 수요도 늘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전국 1인가구 수는 782만9035가구로 전체의 35.5%에 달합니다. 열 집 중 서너 집은 1인가구인 셈이죠.
이런 변화의 흐름을 글로벌 기업들이 읽은 겁니다. 이미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미국계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영국계 자산운용사 ICG, 글로벌 부동산 투자회사 하인즈 등 해외 유수 기업들이 국내 수도권에서 임대주택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운영하는 주택은 '풀퍼니시드'(Full Furnished) 위주로 제공됩니다. '풀옵션'(Full Option)에서 더 확장된 개념입니다. 필수 가전에 더해 생활 편의성을 높일 가구 및 가전까지 비치하는 거죠.
민간에서 공급하는 '풀옵션 원룸'이 통상 에어컨, 세탁기,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이 포함된 원룸이라면요. 풀퍼니시드는 TV, 인터넷, 침대, 쇼파 등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들어가도 살 만한 시스템이죠.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지웰홈스라이프강동'(도시형생활주택)은 모건스탠리가 집주인인 민간임대주택인데요. 홈페이지에서 랜선 구경해보니 약 7평짜리 원룸이 풀퍼니시드로 제공돼 마치 호텔이나 레지던스를 연상케 합니다.
아울러 커뮤니티시설도 갖춰져 있습니다. 통상 원룸형 건물은 공동 시설이 부족해 인근에 카페, 헬스장 등이 들어서곤 하죠. 하지만 이 주택에선 굳이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을 듯합니다.
건물 내 헬스장, 시네마룸, 라운지 등의 공유 공간이 있거든요. 멤버십라운지에선 프린터, 커피머신, 스타일러 등을 사용할 수 있고요. 이처럼 임차인들은 기업이 전문적으로 관리·제공하는 고품질 서비스를 누릴 수 있죠.
월세, 여기서 더 오른다고?
다만 세상에 어디 공짜가 있나요. 기업형 민간임대주택이 이처럼 고급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만큼 임대료가 비쌉니다.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을 방에서 건물 전체로 확장한 셈이니까요.
지웰홈스라이프강동의 경우 5평(16.59㎡·홈페이지 기준 실사용 면적)과 7평(22.81㎡)의 원룸을 임대하고 있는데요. 네이버부동산을 보면 5평 원룸의 임대료는 보증금 300만~500만원에 월세 75만~90만원 수준입니다.
여기에 관리비(월 15만원)까지 포함하면 매달 부담하는 주거 비용이 100만원 안팎이 되겠네요. 7평 원룸의 임대료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105만~135만원이고요.
ICG가 주인인 서울 동대문구 위브플레이스회기는 전용 16㎡가 단기 임대로 보증금 362만원, 월세 199만원에 매물이 나와 있고요. KKR이 주인인 서울 영등포구 위브스위트 선유파크사이드의 전용 20㎡는 한 달 이용료가 250만원입니다.
서울에 위치한다고 해도 소형 주택의 월세치고는 상당히 비싸 보이죠. 이에 아직까지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분위기인데요. 그럼에도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 시장 진출을 노리는 이유가 뭘까요.
한 업계 관계자는 "월세가 오르고 있고 전세사기 등으로 시장이 월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며 "인구구조 변화 등도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기업형 임대사업에 점차 관심을 보이는 추세"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4년 전국 주택 월세가격지수는 1월 104.0에서 꾸준히 올라 11월엔 105.2를 기록했습니다. 그동안 땅값 등 투입 비용 대비 적었던 수익률을 높아진 월세로 끌어올려 볼 수도 있겠죠.
최근 정부가 기업형 임대주택 활성화에 나선 것도 추세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기업이 임대주택을 20년 이상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형 장기 임대주택'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기업의 사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임대료 규제를 풀고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게 골자인데요. 이를 통해 2035년까지 기업형 임대주택을 10만가구 이상 공급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습니다.
임대주택 유형이 더 다양화될 듯한데요. 하지만 세입자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합니다. 기업이 공급하는 임대주택 물량이 많아질수록 가뜩이나 상승세인 월세가 더 오를 수 있거든요.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개인이 운영하는 임대는 시세에 따라 가격이 떨어질수도 있지만 기업이 임대시장 주도권을 쥐고 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전반적으로 시장 가격이 동반 상향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