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국세청에 세무신고를 할 때 사업자등록번호를 잘못 적으면 어떻게 될까. 고의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담당자의 단순 실수임에도 국세청은 '규정대로' 하자며 어김없이 가산세를 매겼다.
그런데 가산세까지 매긴 국세청의 처분은 과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기업이 탈세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면 국세청이 규정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흥국생명의 코드 실수
10일 조세심판원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지난해 2월 국세정보통신망을 통해 2013년 귀속 이자·배당소득 지급명세서 2만719건을 제출했다. 신탁상품 투자자에게 이자와 배당을 지급한 내역을 국세청에 낸 것인데, 이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 유가증권 표준코드에 사업자 번호(10자리)가 아니라 내부관리코드(7자리)를 적어 넣은 것이다.
뒤늦게 오류를 확인한 흥국생명은 지난해 8월 사업자등록번호를 다시 써서 국세청에 냈다. 지급명세서는 국세청이 투자자에게 돌아간 이자·배당소득을 파악하기 위해 금융회사로부터 받는 서류 내역이다. 흥국생명은 이미 명세서에 투자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제대로 적었기 때문에 국세청의 소득 파악에는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흥국생명의 실수를 확인한 국세청은 '규정대로' 처리했다. 지난 1월 흥국생명이 낸 법인세에 지급명세서 불성실을 이유로 가산세 1억원을 통보한 것이다. 코드번호가 잘못 적혔기 때문에 유가증권의 발행자(흥국생명)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가산세 부과의 근거였다.
◇ 국세청 "법대로 하자"
흥국생명은 억울했다. 문제가 된 투자 대상은 유가증권 표준코드가 없는 사모발행 회사채인데, 새로 업무를 맡게 된 회사내 담당자가 사업자번호를 적어야 한다는 규정을 몰랐다는 것이다. 세금을 피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그냥 단순 실수였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국세청은 요지부동. 국세청은 "지급명세서에 사업자번호를 기재하는 것은 세법상의 의무인데, 기업이 잘못 기재한 내용을 국세청이 다시 파악하는 것은 과도한 부담"이라고 일축했다. 아무리 실수라도 명백히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흥국생명 스스로 가산세의 책임을 지라는 의미다.
실수를 바로 잡았는데도 가산세를 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식을 근거로 판단했을때 '부당한' 가산세를 내지 않고 국세청과 싸워야 할까. 고민하던 흥국생명은 결국 한영회계법인을 세무대리인으로 선정해 조세심판원을 찾았다.
◇ "가산세는 너무합니다"
조세심판원은 지난 달 20일 심판관 회의를 열어 흥국생명의 대리인을 불렀다. 사정을 들어봤더니 2013년 이전에는 한번도 지급명세서를 잘못 쓴 적이 없고, 명세서의 32개 기재항목 중 나머지 31개 항목에도 오류가 없었다.
흥국생명은 단 한 번의 실수로 가산세를 물게된 것이었다. 조세심판원도 국세청의 과세에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심판원은 "지급명세서에 사업자번호 대신 내부관리코드를 적었다고 해서 국세청이 이자·배당소득의 지급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며 "가산세 부과 처분은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에 대해 보험 및 자본시장 업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애초부터 금융회사가 이자·배당소득 지급명세서를 제출할 때 실수하면 가산세를 물어야 하는 규정이 잘못됐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국세청이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업무처리 과정에서 규정을 대로 준수했는지 따지는 시어머니 때문이다. 추후 감사원의 지적을 받지 않으려면 규정대로 처리해야 하니 자의적 판단으로 업체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다는 게 국세청 입장이다. 과세 담당자도 감사원의 징계가 두렵기 때문에 기업의 사소한 실수를 이유로 융통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산세는 기업의 세무조정 과정에서도 손금(비용)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심하면 담당자의 월급에서 차감하는 경우도 있다"며 "국세청의 재량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번 조세심판원의 판단은 기업과 재무 담당자 입장에선 의미있는 처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