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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당국 책임만 피한 자율 아닌 자율규제

  • 2016.01.08(금) 17:37

[회계사 주식거래 철퇴]③회계사 회칙으로 위법규정
다단계식으로 규제 만들어 감독당국 책임은 회피

공인회계사와 회계법인은 금융감독당국의 감시와 감독을 받는 전문자격사다. 공인회계사가 되기 위한 시험도 금융감독원의 감독하에 치러지고, 회계사와 회계법인의 등록과 개업은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이는 모두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과 공인회계사법 등 법령에 근거한다.

 

회계사에 대한 징계도 마찬가지다. 법령에 따라 금융위원회가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처분을 의결한다. 회계사가 업무를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업무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것까지 모두 법률에 근거한 감독당국의 책임 하에 이뤄지는 셈이다.

 

그런데 올해부터 시행되는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의 감사대상 주식투자 전면 금지 방안은 그 책임소재가 모호하다. 법령에서는 그 내용을 찾을 수 없고, 회계사들의 모임인 한국공인회계사회의 내부 지침에 의해 스스로 규제하도록 돼 있다. 민간의 자율규제다.

 

 

# 법대로 하면 투자해도 되는데

 

현행 외감법과 공인회계사법에는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 중 특정 회계감사에 투입된 회계사와 파트너급 임원만 해당 감사대상 기업의 주식을 거래하거나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특정기업 감사에 투입되는 회계사는 대기업이라도 20~30명 정도이고, 파트너라는 명칭이 붙는 임원 회계사는 회계법인 내에서도 1%가 채 안된다. 법대로면 나머지 상당수 회계사들은 직접적인 업무 연관성만 없으면 주식 투자가 자유롭다. 회계법인 내부규정에 따라 보유현황을 보고만 하면 된다.

 

그런데 올해 1월부터 공인회계사회 차원에서의 지침이 하나 생겼다. ‘회계법인 임직원의 주식거래현황 관리지침’인데, 감사업무에 투입되지 않은 회계사들도 소속 회계법인이 감사하고 있는 기업의 주식은 거래할 수 없다는 지침이다. 155개 회계법인 9500여명 모두에게 적용되는 포괄적 규제다.

 

해당 거래주식이 있는 경우 즉시 팔아야만 회계법인이 해당 기업의 외부감사 용역을 따 낼 수 있다. 회계사가 팔지 않고 버틴다면, 이 회계사는 회계법인에서 퇴출을 면하기 힘들다. 제 발로 나가지 않으면 쫓겨나는 상황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규정이 법령이 아니라 회계사들의 이익단체인 한국공인회계사의 내부 지침이라는 것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더라도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회계사들은 모두 규정을 따르고 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 민간단체 지침으로 법적 강제성 요구하는 감독당국

 

회계사회의 지침은 민간 자격사 집단의 내부 지침에 불과하지만 파급력은 법령 수준에 가깝다. 법에서 대부분의 권한을 공인회계사회에 위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법은 회계사가 법을 위반했을 때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등 법위반 사항뿐만 아니라 ‘공인회계사회의 회칙을 위반했을 때’도 포함된다. 특히 회계사회가 회원인 회계사의 징계를 금융위에 요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회계사회의 회칙은 더 세부적이고 광범위하게 징계범위를 적시한다. 한국공인회계사회의 회칙 제16조와 56조에는 회계사 직무와 관련된 법령뿐만 아니라 회칙, 그리고 회칙에 의한 내규와 감사기준, 교육기준, 회가 정한 제반기준 및 관련 세부지침, 회 이사회 등이 의결한 사항까지 모두 징계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민간 이익단체의 자체 지침만 어겨도 상위의 법령을 위반할 수 있도록 다단계식으로 규율을 만들어 회계사들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법률도 시행령도 시행규칙도 심지어 회칙도 아닌 회계사회의 지침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다.

 

 

# "위헌소지 알기에 법적 접근 안했다"

 

감독당국이 다단계식으로 회계사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이유는 뭘까. 업계는 당국의 책임회피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회계업계 한 관계자는 “회계사의 주식거래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판단된다면 금융감독당국이 법령을 정해서 법에 따라 규제를 해야지, 내부 지침으로 스스로를 고발하도록 만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감독당국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업무와 무관한 주식거래에 대한 규제는 헌법상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문제는 감독당국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다.

 

금감원 고위관계자는 “감사도 안하고 임원도 아닌데 소속 회계법인이 감사한다고 해서 주식을 무조건 취득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법으로 강제하는 실익에 비해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크고, 법을 만들더라도 규제개혁위원회나 이런 곳에서 통과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법령으로 규제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또 “회계법인 스스로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권장하고 관리를 엄격히 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회계사회가 자율적인 민간단체이기 때문에 회원의 자율적인 규약의 형태로 규제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당국이 '자율규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잘못이 있으면 스스로 벌을 내리도록 하는 묘한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젊은 회계사들의 집단 부정이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당국이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제도적 대안을 고민하지 않고, 회계업계 전반에 대한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대응하는 것은 책임있는 당국의 자세가 아니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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