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거인의 쓸쓸한 퇴장' 1세대 기업인 신격호

  • 2015.07.29(수) 21:49

폭격으로 공장 불 타..비누·껌으로 화려한 재기
한때 제철업 뜻 품기도..70년대 사업확대 드라이브
"세계 자랑할만한 시설 남기고픈 마음뿐"
두 아들 다툼 끝 경영일선 사실상 물러나

▲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지난 28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이날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됐다.

 

지난 28일 오후 10시 김포공항. 휠체어에 몸을 실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 100여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 이날 현장에서 신 총괄회장은 빗발치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시장을 석권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고국에 돌아와 재계 5위의 그룹을 키워낸 창업주의 모습이라 하기엔 공허함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신 총괄회장은 이날 오전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회에서 해임됐다. 1948년 자신이 작명한 회사 '롯데'의 대표(1948년)를 맡은 지 67년, 일본에서 첫 사업(1945년)을 시작한 지 70년만의 퇴장이다.

◇ 잿더미 속에서 '만인의 연인(戀人)'으로

신 총괄회장은 1922년 10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둔기리에서 5남5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故 노순화 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딸을 낳았다. 신영자 롯데재단 이사장이다.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후 결혼한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씨와의 사이에선 두 아들(신동주·신동빈)을 두었다.

신 총괄회장의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일본인 지인의 도움으로 선반용 기름인 커팅오일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가 연합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고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미군의 B-29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됐다. 이듬해 5월 비누를 만드는 '히까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려 전후 특수를 누린 신 총괄회장은 신사업으로 시작한 껌이 히트를 치면서 1948년 6월 지금의 롯데를 세웠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인 '샤롯데'에서 따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신 총괄회장의 바람이 담겨있다고 한다. 나중에 신 총괄회장은 "롯데라는 상호와 상품명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 제철업 꿈꾼 신격호

신 총괄회장은 원래 한국에서 제철업을 꿈꿨다. 이 과정은 '롯데제과 20년사'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돼있다.

"그 당시 제 개인적인 입장과 관심사를 말한다면, 일본 안에서 롯데 그룹이 일으킨 여러가지 산업분야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곧 식품산업이나 서비스산업을 지양하고 중화학공업에 매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중략) 한국에는 대규모 제철회사가 없었고, 제철업은 워낙 기간산업이므로 앞으로 중화학공업을 지향하는 한국의 앞날에 꼭 필요한 업종이었습니다." (롯데제과 20년사 中)

하지만 정부가 '제철업은 국영(國營)으로 한다'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롯데는 제철업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성공한 제과업을 한국에 들여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문을 연 곳이 롯데제과다. 1967년 지금의 롯데리아 본사가 자리한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초기자본금 30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만약 신 총괄회장의 구상대로 롯데가 제철업을 시작했다면 롯데는 지금의 포스코처럼 중후장대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 됐을지 모른다.

◇ 韓 사업발판 '호텔롯데'

롯데가 재계 5위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은 1970년대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롯데알미늄(1970년), 호텔롯데(1973년), 롯데칠성음료(1974년), 호남석유화학(1979년), 롯데쇼핑(1979년) 등 한국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핵심회사 대부분이 이 시기에 설립됐다. 그 가운데 백미는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이다.

특히 호텔롯데는 한국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이 회사를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한국 롯데그룹의 주인이 달라진다. 롯데그룹 승계문제를 둘러싸고 호텔롯데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 회사가 그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텔롯데는 설립 이후 약 30차례의 증자를 했는데 모두 일본 롯데에서 들여온 돈이다. 이 돈이 롯데그룹이 한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데 종잣돈 역할을 했다. 외자유치가 절실했던 정부도 반겼다.

호텔롯데에 대한 신 총괄회장의 애정은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호텔롯데를 짓기 위해 전세계 유명호텔을 답사하고, 호텔 앞의 나무와 카펫 색깔까지 일일이 지정할 정도로 세심한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호텔롯데는 지금도 일본 롯데가 100% 지분을 보유한 외국인투자기업이지만, 일본에는 단 한 푼의 로열티도 지급하지 않는 독특한 위상을 누리고 있다. 주주에 대한 배당도 설립된 지 20년 넘게 흐른 2006년부터 시작했다.

 

▲ 서울 을지로에 있는 롯데호텔 전경


◇ 30년의 결실 '롯데월드타워'

롯데그룹은 현재 서울 잠실에 123층 규모의 롯데월드타워를 짓고 있다. 건물이 완공되는 내년 말에는 높이 555m의 국내에서 가장 높은 랜드마크가 세워진다. 롯데그룹이 1984년 서울시에 초고층 건축물 건립 가능성을 문의한 이후 무려 30년을 기다린 끝에 결실을 맺는 신 총괄회장의 숙원사업이다.

그는 초고층빌딩을 지으려는 이유를 1995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나이 74세 때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다. 21세기 첨단산업 중 하나가 관광입니다. 그러나 한국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조국에 남기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놀이시설도, 호텔도 제대로 한번 세울 것입니다." (경향신문 1995년10월1일자)

신 총괄회장은 지난 5월에도 롯데월드타워 79층에 올라 공사현장을 둘러봤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 곳이 시민들이 사랑하고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싶어하는 명소가 되도록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월드타워를 후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사업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게 그를 만나본 사람들의 전언이다.

◇ 거인의 쓸쓸한 퇴장

신 총괄회장은 가장 늦게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국내 1세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맨 손으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에서 거대한 롯데왕국을 세웠다. 동생인 신철호 전 롯데 사장과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과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 형제간 갈등은 있었지만 신 총괄회장은 흔들림없이 그룹을 키웠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1인자였던 신 총괄회장도 두 아들간 다툼은 어쩌지 못했다. 올해 1월초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경질된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난 27일 아버지를 앞세워 동생(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허를 찔렀고, 다음날 신동빈 회장은 논란의 불씨을 차단하려고 아예 신 총괄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했다. 

롯데측은 "경영권과 무관한 분들이 신 총괄회장의 법적 지위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 신 총괄회장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신 총괄회장은 자신이 세우고 키운 회사에서 어느날 갑자기 해임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한일 양국에서 성공신화를 써왔던 그간의 삶에 비춰볼 때 아흔이 넘은 그에게 최근의 일은 너무 벅찬 사건이다. 신 총괄회장은 우리 나이로 94세다.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