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현대·신세계 등 백화점 3강(强) 기업이 모두 시내면세점 특허권을 획득하면서 면세점업계의 지각변동이 예상되고 있다. 그간 면세점업계는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이 양강구도를 형성했으나 지난해 갤러리아·신세계·두산이 신규진입한 데 이어 이번에 현대백화점이 추가 입성하면서 면세점업계가 춘추전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 무시못할 업력, 일자리 배수진도
지난해 월드타워점을 잃은 롯데면세점은 1년간 절치부심 끝에 재기에 성공했다. 롯데면세점은 관광활성화를 위해 앞으로 5년간 2조3000억원을 투자하고 외국인관광객 1700만명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심사과정 중 롯데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불똥을 맞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으나 오랜기간 면세점 사업을 해온 업력이 힘을 발휘했다.
롯데는 법규준수도에서 만점(80점)을 받았고, 재무건전성 및 투자규모의 적정성(180점 만점에 140.88점)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땄다.
롯데면세점 노사가 고용문제를 앞세워 특허권 획득의 당위성을 호소한 점이 주효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재벌은 미워도 직원들의 일자리까지 잃게 할 순 없지 않느냐'는 동정론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정부도 투자촉진과 일자리 창출을 신규 특허권 부여의 명분으로 내세운 만큼, 롯데를 탈락시켜 대규모 실직으로 이어지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롯데면세점은 "지난 6개월간 월드타워점에서 다시 일하기를 기다리며 심적으로 불안감을 가지고 지내왔던 1300여명의 직원들이 다시 원래의 일자리로 복귀할 수 있게 돼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관세청에 제출한 사업계획서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장선욱 대표와 문근숙 노조위원장 등 롯데면세점 노사가 지난 10월초 면세점 신규특허 입찰 제안서 제출에 앞서 롯데월드타워 123층 전망대에 올라 특허획득 의지를 다졌다. |
◇ 꼴찌의 반란, 이번엔 1등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현대백화점과 신세계DF다. 특히 지난해 7월 대기업몫으로 배정된 시내면세점 특허권 2장을 두고 벌인 1차 대전에서 꼴찌를 기록했던 현대백화점은 이번에 총점 801.50으로 면세점 도전 5개사 중 1위를 기록했다. 현대백화점은 면세점을 단 한 곳도 운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사업의 지속 가능성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120점 만점에 113점)를 받았다.
자본금 규모를 현재 1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늘리고, 앞으로 5년간 면세점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지 못해도 5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속하는 등 면세점 획득의 진정성을 강조한 것이 심사과정에서 높은 평가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현대백화점은 면세점이 들어설 무역센터점을 자사의 유통역량을 활용해 초대형 럭셔리 면세점으로 꾸민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루이비통 등 해외 명품 브랜드를 공급하는 부루벨코리아와 입점협약을 맺었다. 발표 과정에서 '명품 입점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현대백화점의 명품유치력을 감안할 때 여느 신규면세점과는 다른 매장구성을 띠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시내면세점 특허권 획득 직후 "기존 면세점과 차별화된 면세점을 구현해 시장에 활력을 주고, 국내 면세점의 품격을 한단계 끌어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탈락 이후 재수 끝에 시내면세점 특허권을 거머쥐었다. 사진은 현대백화점의 시내면세점이 들어설 코엑스 무역센터점 전경. |
◇ "약속은 지킨다" 승부수
지난해 말 이미 시내면세점 특허권을 따낸 신세계는 이번 시내면세점 입찰에서 다크호스에 속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신규면세점 추가허용에 부정적이던 신세계는 막상 입찰경쟁이 시작되자 '약속을 지키는 면세점'이라는 이미지를 적극 부각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신세계는 백화점 본점 옆 메사빌딩에 지난 9월 550석 규모의 한류문화공연장을 연데 이어 최근에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전시·판매공간을 오픈했다. 면세점 매출과 직결된 시설은 아니지만 지난해 특허권을 획득할 때 약속한 사안을 차분하게 이행한다는 사실을 안팎에 알린 것이다. 이 덕분에 신세계는 관광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70점 만점에 62.67점)과 기업이익의 환원(80점 만점에 71.11점)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신세계가 면세점 특허권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정유경 총괄사장의 부상과 무관치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동생인 정 총괄사장은 지난해 말 사장 승진 이후 백화점과 면세점, 패션사업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대구신세계 오픈에 맞춰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상 경영전면에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행보다. 신세계 안팎에선 이번 시내면세점 입찰에서 소극적이던 신세계의 분위기가 바뀐 이유로 정 총괄사장을 지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세계는 "문화예술 관광허브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인정받은 것 같다"며 "센트럴시티 일대를 개별 관광객의 중심지로 만들고 그 수요를 서초, 강남뿐 아니라 전국으로 전파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 정유경(사진 가운데) 신세계 총괄사장이 지난 15일 대구신세계 개점을 맞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세계가 면세점 특허권 획득에 적극 나서게 된 배경으로 정 총괄사장의 존재를 꼽는 이들이 많다. 정 총괄사장은 백화점과 면세점, 패션사업 등을 이끌고 있다. |
◇ 면세점 13개 부작용 우려도
이번 결과로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 중심의 면세점 지형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국내면세점 시장의 80%는 롯데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다. 이번에 현대백화점이 시내면세점 시장에 진출하고, 신세계가 추가적인 면세점을 획득하면서 면세점업계의 독과점 구조에도 균열이 갈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면세점은 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직매입 중심의 사업이라 자금력과 마케팅 능력이 중요하다"며 "적어도 셋 이상의 경쟁력있는 사업자가 싸워야 독과점 논란도 수그러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당장은 면세점업계의 출혈경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지역의 경우 지난해 6곳이었던 면세점이 올해 9개로 늘면서 신규면세점이 줄줄이 적자를 기록하고, 기존 대형면세점도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더해 내년에 4개(롯데·현대·신세계와 중소중견기업 몫인 탑시티면세점)가 문을 열면 서울에만 시내면세점 13개가 경합하는 구도가 된다. 여기에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 정부가 저가여행을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면세점업황을 낙관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효주·오대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중장기적으로 자본력과 규모의 경제를 갖춘 대형 업체중심으로 재편이 되겠으나, 단기적으로 경쟁심화와 수요 둔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