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독립운동돈줄 #상해임시정부아지트 #글로벌마케팅의시작
활명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입니다. 소화제가 독립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하시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아버지와 함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차린 민강 선생은 사실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동화약방을 책임지게 됐지만, 그의 관심은 약방보다는 온통 독립운동에 쏠려있었죠.
민강 선생은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동화약방 내에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씁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월급을 주면서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7년에는 뜻맞는 동지들과 함께 현재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웠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인 '서울약햑교' 설립에도 참여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909년에는 각계 인사 8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심지어 상하이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를 동화약방 내에 설치토록 하고 자신이 책임자가 됩니다.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의 한 켠을 상해임시정부의 비밀 아지트로 내주고 약방 경영과 독립운동을 투트랙으로 진행한 겁니다. 약방에 설치된 서울 연통부를 거점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한성과 상하이를 오가며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동화약방은 상하이임시정부의 돈줄이었습니다. 가난했던 상하이임시정부에 동화약방의 지원은 큰 힘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상하이임시정부에 활명수를 판매한 돈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를 일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민강 선생이 활명수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일제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민강 선생은 일간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는 광고까지 게재하는 간 큰 행보를 보입니다. 일제에겐 민강 선생이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민강 선생과 동화약방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매서워집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민강 선생은 전략을 바꿉니다. 당시 고가(高價)였던 활명수를 아예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쥐여줍니다. 대신 해외 현지에서 나가 직접 판매토록 했습니다. 이렇게 판매한 돈은 모두 상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민강 선생의 치밀한 전략이었습니다. 민강 선생의 이런 전략은 활명수가 만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저 멀리 하와이에까지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의도치 않게 적극적인 해외 마케팅을 한 셈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민강 선생의 독립운동은 계속됩니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도 심해졌습니다. 결국 민강 선생은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사망합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민강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6년에는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습니다. 이것이 활명수가 독립투사가 된 배경입니다.
#주인은바뀌어도 #독립운동은계속 #체계를갖추다
약방 대표가 독립운동에 매진하니 약방이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동화약방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집니다. 민강 선생은 동화약방을 주식회사로 전환했음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민강 선생 사후 동화약방은 민강 선생의 부인과 아들 등이 대표를 맡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전문 경영인이 아니었던 만큼 동화약방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화약방은 인수자를 물색합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보당(保堂) 윤창식(尹昶植) 선생입니다. 윤창식 선생은 당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더불어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지요. 윤창식 선생은 1915년 항일 비밀 결사 단체였던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해 경제 독립운동 전개에 나섰습니다. 민족자본 형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제인들의 힘을 규합해 재력을 키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동화약방은 윤창식 선생의 이런 면을 보고 그에게 인수를 제안합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윤창식 선생은 마침내 1937년 동화약방을 인수합니다. 윤창식 선생이 인수한 이후 동화약방은 본격적으로 체질 개선에 나섭니다. 윤창식 선생은 우선 동화약방의 조직을 전면 개편하고 지배인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더불어 주요 책임자에 지식인과 독립운동가 등 명망이 있는 인물을 앉혔습니다.
윤창식 선생은 대내외적으로 동화약방의 기틀을 바로잡는 데 전념했습니다. 1939년에는 동화약방의 사규를 제정해 사원복지제도도 확립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더불어 만주 지역으로 진출,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신규 시장을 개척하기도 했죠. 더 놀라운 사실은 여전히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 국내 첫 여성 약사였던 조선약학교 출신의 장금산(張金山) 약사를 만주 책임관리 약사로 임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윤창식 선생의 이런 체계적인 경영 덕분에 동화약방은 기사회생합니다. 동화약방의 히트 상품이었던 활명수의 판매도 더욱 늘어나게 됐죠. 물론 시련도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제는 조선의 제약산업을 통제, 관리했습니다. 동화약방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동화약방은 선제적인 대응과 활명수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일제의 탄압을 잘 견뎌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활명수에는 구한말 일제의 탄압에 맞선 당시 지식인들의 회한이 담겨있습니다. 활명수를 판매한 자금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고 활명수를 제조하던 사람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고종황제의 비방에서 독립투사까지 활명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제품입니다. [결정적 한끗] 다음 편에서는 활명수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기록들을 좀 더 살펴보려 합니다.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