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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계가 '느림의 미학'에 빠진 이유

  • 2022.06.10(금) 06:50

EU, 2030년까지 패스트패션 퇴출 예고
세계적으로 패스트패션 성장세 '주춤'
국내 패션 업체, '친환경' 행보 가속화

/그래픽=비즈니스워치

#패션에 관심이 많은 A씨는 한때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를 즐겨 입었다. 디자인도 다양한데다 가격도 저렴해서다. 운이 좋으면 지하철 요금보다 저렴한 옷을 찾기도 했다. 어느 날 A씨는 매장에 가는 비용보다 옷이 더 싸다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이후 SPA 브랜드 이면엔 환경오염과 노동 착취 등의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A씨는 더 이상 SPA 브랜드를 이용하지 않고 있다.

의류업계에서 '의류를 천천히 바꿔 입자'는 슬로패션 바람이 거세다. 가치 소비 트렌드와 희소성 있는 제품을 찾는 수요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반면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꼽히는 패스트패션은 퇴출 위기에 놓였다. 국내 의류 업체들도 친환경 소재를 활용해 의류를 만드는 등 슬로패션 열풍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패스트패션, 10년 내 사라진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최근 패스트패션에 대한 규제를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오는 2030년까지 재활용 섬유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팔리지 않은 재고품을 폐기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또 미세 플라스틱 배출 억제, 의류 산업의 국제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규정을 제안했다.

패스트패션은 의류 주기를 짧게 해 대량으로 생산·판매하는 의류 산업이다. 1∼2주 또는 3∼4일 만에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을 빠르게 만든 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이익을 남기는 방식이다. 유니클로, 자라, H&M, 탑텐, 스파오 등 SPA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이들 브랜드는 2000년대 초반 가성비를 앞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유니클로는 2005년 한국 진출 이후 10년 만에 연 매출 1조원을 달성했다.

EU가 규제에 나선 것은 패스트패션이 환경오염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어서다. 보통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약 7000리터(ℓ)의 물이 필요하다. 4인 가족이 약 일주일 동안 쓸 수 있는 물의 양이다. 특히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옷값을 낮추기 위해 나일론이나 아크릴 등 합성섬유를 이용한다. 합성섬유는 기본 속성이 플라스틱과 유사해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EU는 배출되는 미세플라스틱 중 35%가 아크릴과 폴리에스터 소재 의복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산했다.

캄보디아의 버려진 공장에서 사람들이 수백톤(t)의 헌옷을 분류하고 있다. /사진=언스플래쉬

패스트패션이 과잉 소비와 과잉 생산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많다. 유명 SPA 브랜드 업체들은 팔다 남은 재고를 재활용하는 대신 매립하거나 소각한다.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다. 또 저렴한 SPA 브랜드 옷은 소비자들에게 쉽게 사고 버리는 옷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9년 매일 가정에서 141.8톤(t)의 의류 폐기물이 나왔다. 제품 단가를 낮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 착취도 문제다. SPA 브랜드 업체들은 소수의 유명 디자이너 대신 수백명의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규제가 허술한 국가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다.

업계에선 이번 EU 규제를 사실상 유럽 내 패스트패션의 종식 선언으로 본다. 주요 글로벌 SPA 브랜드인 자라(스페인), H&M(스웨덴), 아소스(영국) 모두 유럽 브랜드다. 새 규정이 적용되면 무분별하게 생산과 폐기를 반복했던 패스트패션 업체들은 기존 운영체계를 모두 변경해야 한다. 패스트패션의 문제는 꽤 오랫동안 지적돼 왔으나, 기관이 직접 규제를 예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심적 패션' 시장 10조 전망

소비자 사이에선 패스트패션에 대한 반작용으로 슬로패션이 화두로 떠올랐다. 슬로패션은 유행을 타지 말고 개성과 취향을 살린 제품을 오래 쓰는 흐름이다. 의류 소비량 자체를 줄이거나 중고 제품을 사는 운동도 슬로패션에 포함된다. 중고 제품의 경우 품절됐거나 절판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가치 소비 트렌드와 희소성을 추구하는 수요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실제로 패스트패션 업체들의 성장세는 지속해서 꺾이는 추세다. 미국에서 한인 성공 신화를 쓴 SPA 브랜드 포에버21은 지난 2019년 파산보호 신청 후 헐값으로 매각됐다. 국내에선 해외SPA 브랜드가 고전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수익성이 악화한 유니클로, 자라, H&M은 명동점과 홍대점 등 주요 거점 매장을 줄줄이 폐점했다.

/그래픽=유상연 기자 prtsy201@

패스트패션의 위기는 실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코로나19 여파로 자라는 지난 2020년 처음으로 매출 감소를 경험했다. H&M의 매출 역시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반토막 났다.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회복)를 시작한 지난해에도 매출은 감소하거나 유지하는 데 그쳤다. 국내 SPA 브랜드가 가성비와 친환경 이미지 개선을 통해 반격을 꾀하고 있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향후 5~10년 사이 패스트패션 업체들의 수익이 약 30%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시장조사 업체 리서치앤드마켓은 전 세계적 양심적 패션 시장이 2019년 63억5000만달러(약 7조6100억원)에서 2023년 82억5000만달러(약 1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패션업계, '친환경'을 입다

국내 의류업계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는 분위기다. 의류 업체들은 친환경 소재나 포장재를 활용해 만든 제품을 내놓고 있다. 재고 옷이나 단추, 지퍼 등을 재활용해 새 제품으로 만드는 업사이클링 열풍도 두드러진다. 해외에선 이미 에르메스와 파타고니아, 나이키 등이 업사이클링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하 코오롱FnC)은 최근 소셜벤처 케이오에이(K.O.A)를 인수했다.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케이오에이와 손잡고 친환경 사업을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회사는 지난 2012년부터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RE;CODE)를 전개하고 있다. 래;코드는 3년이 지난 재고나 자동차 에어백, 텐트 등 산업 소재를 해체해 새 옷을 만든다. 이를 통해 연간 40억원가량의 의류 폐기물 소각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아웃도어 브랜드 코오롱스포츠는 오는 2023년까지 친환경 소재를 적용한 제품을 전체의 절반 수준까지 확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자주도 2025년까지 의류의 70% 이상을 지속가능한 제품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올 초 아시아 최초로 '코튼 메이드 인 아프리카(CmiA)'의 독점 사용권을 확보했다. CmiA는 지속가능한 면화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 농부를 지원하는 국제 표준이다. 환경 보호뿐만 아니라 성평등, 노동 착취 금지, 농업 기술 교육 등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자주는 티셔츠와 팬츠 등을 시작으로 CmiA 라벨 제품을 늘릴 계획이다.

명품 플랫폼 머스트잇은 지속가능한 의류 제품을 파는 카테고리를 별도로 구성했다. 머스트잇 측은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기획전을 준비했다"며 "나뿐만 아니라 환경과 지속가능한 지구까지 생각하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기획전 카테고리는 △자연 직물 소재로 재단한 제품 △중고 제품 △재활용 소재 활용 제품으로 구성했다. 이번 기획전에선 마르니, 루이비통, 구찌 등의 친환경 명품 제품을 최대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저렴한 옷을 많이 사기보단 신념에 따라 소비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친환경 요소를 소비의 잣대로 삼는 고객층이 늘고 있다"면서 "소비자 인식이 변화하는 만큼 패션업계의 친환경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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