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비맥주가 업계 1위 브랜드 '카스'를 보좌할 세컨드 브랜드로 낙점했던 '한맥'이 출시 4년차인 지난해에도 시장 안착에 실패했다. 지난해 대대적인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했음에도 점유율을 전혀 반등시키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한맥이 '5년차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롯데칠성음료의 야심작이었던 클라우드생드래프트, 피츠 수퍼클리어도 모두 출시 5년차에 단종된 바 있다.
0.7%
맥주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용 맥주 시장에서 오비맥주 한맥의 점유율은 전년과 동일한 0.7%였다. 하이트진로의 신제품인 '켈리'는 물론 롯데칠성음료의 신제품 맥주 '크러시'보다 낮은 점유율이다. 국내 맥주 3사가 내놓는 맥주 브랜드 중 한맥보다 점유율이 낮은 건 이벤트성 제품인 '오비라거' 뿐이다.
더 심각한 건 한맥이 지난해 대대적인 리뉴얼에 나섰다는 점이다. 한맥은 지난해 초 브랜드 모델을 배우 이병헌에서 가수 겸 배우 수지로 변경했다. 제품 역시 거품 지속력과 부드러운 목넘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고 '환상거품'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워 새 마케팅에 나섰다.
최근 맥주 시장이 아사히와 삿포로 등 일본 맥주를 중심으로 '거품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 리뉴얼이었다. 앞서 아사히는 뚜껑 전체를 여는 '풀 오픈 탭' 방식의 캔을 도입해 열자마자 거품이 올라오는 '아사히 슈퍼드라이 생맥주'를 내놔 품귀 현상을 빚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경쟁사인 하이트진로의 켈리, 롯데칠성의 크러시가 각각 출시 2년과 1년 만에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한자릿수 점유율을 확보했다. 반면 한맥은 점유율 1% 벽을 넘지 못했다. 출시 초 점유율이 '끝까지 간다'고 할 정도로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국내 맥주 시장에서 첫 4년을 떠나보낸 한맥의 반등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첫 단추
업계에서는 한맥이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맥은 2019년 하이트진로의 테라에 맞서기 위해 개발을 시작한 맥주다. 하이트진로가 맥주 사업의 명운을 걸고 내놓은 테라가 대성공을 거두며 하이트-테라의 라인업을 갖추자 오비맥주 역시 카스를 보조할 세컨드 브랜드 개발에 나섰다. 한맥이 카스와 달리 '녹색 병'을 도입한 것 역시 테라를 의식한 행보라는 분석이 많았다.
한맥은 2020년 여름 시즌 처음으로 공개됐다. 한국인의 주식인 '쌀'을 첨가했다는 점, 제품명에 '한'자를 넣고 '코리안 라거'를 강조한 점 등 당시 노 재팬 운동에 따른 애국심 마케팅을 곁들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터지며 오비맥주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2021년 1월 정식 출시 후엔 맥주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유흥 시장이 사실상 멈췄다. 신제품을 내놨는데 팔 곳이 사라진 셈이다.

한맥의 점유율이 올라오지 않자 오비맥주는 출시 2년 만인 2023년 리뉴얼에 나섰다. 4단계 미세 여과 과정을 통해 부드러움을 방해하는 요소를 걸러내고 최상의 주질을 구현했다며 부드러운 목넘김을 강조했다. 패키지와 전용잔도 새로 디자인했다.
하지만 경쟁사인 하이트진로가 배우 손석구를 앞세운 신제품 '켈리'를 출시, 주도권을 빼앗겼다. 호박색 병을 도입하는 등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로 나선 하이트진로에 비해 '마이너 업그레이드'에 가까웠던 한맥의 리뉴얼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연말엔 롯데칠성도 새로운 병 디자인과 가수 카리나를 앞세운 신제품 맥주 '크러시'를 출시하며 한맥을 밀어냈다.
마의 5년
한맥은 올해 출시 5년차를 맞이한다. 롯데칠성의 '피츠 수퍼클리어'는 2017년 출시 후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다가 5년 만인 2022년 단종됐다. 2020년 출시됐던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도 5년차인 지난해 단종 수순을 밟았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한맥도 올해가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맥은 마케팅 방향을 가정 시장에서 유흥 시장으로 틀었다. 크리미한 거품을 강조하는 한맥의 특성이 생맥주 시장에 더 잘 맞는다는 판단에서다. 유흥 시장을 공략하려다가 실패하고 가정 시장으로 방향을 튼 크러시와 정반대 행보다. 맥주 1위 브랜드 카스를 보유한 오비맥주인 만큼 영업력을 앞세워 한맥 생맥주를 보급하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3월엔 생맥주 라인을 '한맥 엑스트라 크리미 생'으로 리뉴얼하고 생맥주를 취급하는 주점을 중심으로 영업을 집중했다. 이에 연초 100여 개에 불과했던 한맥 생맥주 취급 업소가 연말 기준 2000곳을 돌파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또 지난해 메가박스와 손잡고 관람객들에게 맥주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무제한맥' 상영회를 진행한 데 이어 올해엔 신규 캠페인 '수요 한맥회'를 진행하는 등 '영화 볼 때 마시는 맥주'라는 콘셉트를 밀고 있다.
다만 이런 유흥 강화 전략의 경우 필연적으로 기존 카스의 점유율을 잡아먹는 카니발라이제이션(잠식효과)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생맥주를 취급하는 전문점이 아닌 일반 주점은 한 가지 생맥주만을 들여놓는 게 일반적이다. 한맥 생맥주가 보급되면 카스 생맥주의 보급률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출시 초 연착륙에 실패한 브랜드가 5년차에 자리를 잡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도박에 가까운 수를 내지 않는 이상 다음 신제품이 나오면 단종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