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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라응찬의 세력 바둑 조흥과 LG카드

  • 2014.05.13(화) 13:55

하나은행보다 더한 20년 장수 CEO 낸 신한은행
느렸지만 항상 결정구 뿌린 힘은 어디서 나올까?
[우리은행 민영화와 솔로몬의 지혜]④


우리 금융계에서 두 별을 꼽으라면 라응찬 회장과 김승유 회장이다. 두 분 모두 장기 집권하면서 안정적으로 초석을 닦고 나름의 결실까지 맺었다. 엄밀히 말하면 두 분은 동년배는 아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5~6년 차이가 뒤집히는 사례도 많지만, 당시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차이다.

라응찬(1938년생) 회장의 동년배는 하나은행의 초석을 다진 윤병철(1937년생) 회장이다. 두 분은 모두 농협은행에서 금융과 인연을 맺었다. 나이는 윤 회장이 한 살 많지만, 농협은행 입행은 라 회장이 1년 빠르다. 윤 회장은 한국투자금융 시절부터 하나은행 회장(2001년)까지 12년간 장수 CEO를 지냈는데, 본인의 신념에 따라 김승유 회장에게 일찌감치(?) 경영을 넘겼다.

그래서 신한은행-하나은행의 본격적인 성장과 경쟁은 라응찬 회장과 김승유 회장의 집권기다. 라 회장과 김 회장이 비슷한 시기에 금융계의 두 후발 은행을 이끌며 형성한 경쟁 구도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터다. 두 회장의 경쟁은 우리나라 은행의 M&A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 1982년 7월 7일, 민간자본에 의한 최초의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이 설립됐다.

김 회장이 비교적 빠른 템포의 의사 결정으로 M&A를 이끌었다면, 라 회장은 느린 듯하지만 과감한 의사 결정으로 흐름을 바꿨다. 한국투자금융과 일본계 금융의 문화적 영향도 있었다. 한국투자금융은 순수 민간자본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다. 당시 대기업들도 많은 지분을 보유했었다.

우리나라 은행의 M&A는 모두 외환위기 후 은행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시작했다. 두 은행도 마찬가지다. 하나은행은 1998년 전격적으로 단행된 ‘5개 은행 퇴출’에서 충청은행을 떠안았다. 퇴출은행은 아니었지만 역시 독자 생존을 위협받았던 보람은행을 1999년에 합병했다. 2002년엔 부실로 사실상 국영화된 서울은행을 사들였다.

2010년엔 공적자금이 투입되진 않았으나 론스타에 넘어갔던 외환은행을 인수했다. 이후 론스타의 주가조작 등 의혹에 대한 법원 판결 지연 등으로 금융위원회의 승인도 늦어져 2012년 1월에야 공식적으로 인수를 확정했다.

▲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은행권은 이른바 ‘조상제한서’로 불리는 5강 체제였다. 사진은 1980년대 초반 서울 광교의 조흥은행 본점.

신한은행도 마찬가지로 1998년 5개 퇴출 은행 중 동화은행을, 2001년엔 제주은행을 받았다. 하나은행이 서울은행을 인수하자 신한은행도 본격적으로 M&A에 나선다.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아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던 조흥은행을 2003년에 인수했다. 조흥은행도 1999년에 충북은행과 강원은행을 떠안은 상태였기에 이 합병은 총 6개의 은행을 인수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라응찬 회장은 ‘조흥은행과의 합병은 3년 후에 한다’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안으로 조흥은행 직원들을 설득했다. 3년간 투 뱅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두 은행의 문화적 접점을 찾고 합병 과정의 혼란을 줄인다는 포석이다. 이 결정은 실제로 ‘신한+조흥’ 합병에서 안정적인 시너지를 내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줬다.

이 단계적 합병론은 김승유 회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김 회장은 2010년 사실상 인수한 외환은행에 5년의 세월을 제시하며 같은 방식을 제안했다. 현재 하나와 외환은행은 투 뱅크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와 외환은행의 단계적 합병이 라 회장 때처럼 효과를 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외환은행 직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이바지했다.


NICE신용평가 이혁준 평가전문위원은 “신한-조흥의 단계적 합병은 시행착오를 상당 부분 경감시켰다”며 “이것이 합병 직전 두 은행의 시장점유율을 지금까지 꾸준히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신한의 리스크관리능력과 조흥의 저금리 요구불예금 기반이 비교적 잘 결합해 전반적으로 은행업계 평균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라 회장은 단계적으로 진행한 신한+조흥 합병을 2006년에 마무리한 후 곧바로 카드업계 1위인 LG카드를 2007년에 인수한다. 지주회사 체제에서 가장 필요했던 비은행 부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카드사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뚝심과 승부사 기질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M&A다.

현재 대부분 금융지주회사가 은행-비은행 간 격차로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LG카드 인수가 신한금융그룹에 어떤 실익을 줬는지 선명하게 확인된다.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 측면에서 라 회장은 김 회장과 비교하면 한발씩 더딘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그 무게는 달랐다. 애초부터 길(way) 자체가 달랐는지도 모른다.

▲ 신한은행의 창립에 큰 역할을 한 이희건 명예회장이 2011년 3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해 4월 21일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신한은행 본점에서 열린 추모식에 라응찬(아래 사진 오른쪽) 회장을 비롯해 내외빈 200여 명이 참석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세력 바둑을 둔 라 회장(신한금융)이 또각또각 실리 바둑을 둔 김 회장(하나금융)에 미세하게 앞선 듯하다. 현재 그 차이는 아직 집으로 확정하지 못한 외환은행과의 합병 시너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처럼 신한금융이 비교적 호흡이 긴 세력 바둑을 둘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리더십과 안정적인 지배구조였다’고 보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라 회장(신한금융)은 늦은 듯하지만 언제나 결정구를 날렸다. 합병 자체를 급하게 하지 않으면서 문제들을 차분히 제거할 시간까지 허락받은 것은 결국 그의 지배력이라고 봐야 한다.

오너가 아니면서도 사실상 오너십이 있었던 하나금융과 신한금융. 현재 두 금융그룹의 M&A를 통한 성장의 역사를 보면, 다른 은행그룹들과의 차이도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논란도 있다. 그러나 그 논란과 부작용이 현재 두 금융그룹의 모습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글 싣는 순서]
①불완전변태 한빛은행의 탄생
②장사꾼 故 김정태의 ‘국민+주택’ 합병
③김승유의 서울•외환은행 주워 먹기
④라응찬의 세력 바둑 조흥과 LG카드
⑤한국의 CA 꿈꾸는 농협의 민간 체험
⑥M&A로 만들어진 한국 신 Big4 금융
⑦재미없어진 마지막 승부 우리은행 매각
⑧금산분리 규제에 덧씌워진 오너리스크
⑨虛虛實實 희망수량 매각 방식의 승자는?
⑩경영권 매각을 배제한 어떤 것도 꼼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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