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KB호의 침몰을 느낀 것은 이때부터다. 92일 동안, 경영 분쟁 회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봤다. 양측의 격한 논리 대결, 그 과정에서 양측의 정당성 여론몰이, 곱지 않은 여론을 의식한 의지 없는 중재, 노동조합의 개입, 금융산업의 특징이기도 한 감독 당국의 발 담그기, 그리고 상위 기관을 끌어들인 물타기 등.
이 과정에서 KB호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선량한 KB의 직원들을 구할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 하나 조직을 위해 몸을 던져 소리치는 사람도, 책임지는 모습도 없었다. 이미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은 KB호에서 지휘부는 그들이 살아온 생존 방식만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
▲ KB금융그룹 임영록 회장은 4월 18일 오후 경기 고양시 국민은행 일산연수원에서 '반성 속의 새 출발, 위기극복 대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임영록 회장, 이건호 국민은행장을 비롯한 계열사 임원 40여 명, 은행과 카드 영업점 직원 20여 명 등 총 60여 명의 임직원들이 참석했다. 이후 한 달 뒤인 5월 19일, KB금융 내부 사태가 터졌다. (사진=KB금융그룹) |
◊ 어떤 말로도 부인하기 어려운 권력투쟁
지금도 국민은행에선 ‘주전산기 변경 프로젝트가 진행된 지 이미 오래됐는데, 왜 이제야 문제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직원이 많다. 주전산기 변경 프로젝트는 상당한 비용이 들고 은행의 중장기 전략을 구현할 중요한 프로젝트다.
설사 이를 직접 사용하는 직원들이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금융의 정보화가 고도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IT 부문에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전이 벌어지는 우리나라에서 국내 리딩뱅크를 자처했던 국민은행 직원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할 리도 없다.
그들의 의문은 갈등의 양측인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이 주전산기 교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지켜봤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임 회장은 지주회사의 사장 자격으로, 이 행장은 은행의 리스크관리 임원으로서 이 과정을 충분히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관련 프로젝트의 결재라인에 있지 않았다는 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보통 이런 프로젝트는 IT 관련 직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다. 다른 은행의 사례를 보더라도 주전산기 교체 프로젝트는 내부 논쟁이 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비용도 수천억 원이 든다. 이런 주전산기 교체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고위 임원들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몰랐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임원마다 보직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맡은 일이 따로 있긴 하다. 그러나 거대 조직의 임원이 회사의 이런 중요 사안을 전혀 모르고 지나간다는 것도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진정으로 그렇다면, 이 행장은 물론이거니와 임 회장 역시 총괄직인 사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반대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면, 회장과 행장이 된 뒤에 일부 문제를 확인했더라도 해법은 다를 수 있었다. 최소한 서로 낙하산으로 내려온 외부인들이 주식회사의 최종 의사 결정기구인 이사회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경영 분쟁이 꼬박 석 달을 넘겼는데도 금감원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제재심의위원회 회의는 5번이나 열렸다. 안건의 중대함과 추가적인 시비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신중하고 명확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사원까지 끼어든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어찌해야 할지 스스로 방향을 잃었다는 해석이 많은 것도 지금의 현실을 잘 대변해준다.
우여곡절 끝에 제재심에서 결론을 내더라도, KB금융의 3인방인 회장과 행장, 은행 감사가 이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다. 이들은 이미 제재심에서 치열한 법리 논쟁을 주도했다. 문책경고라는 제재 수위를 통한 관례적인 퇴임 압박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당사자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 언론 환경을 고려하면 진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불만과 억울함은 명명백백히 가려야 마땅하다. 진실은 항상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방식의 문제가 있다. 회사와 직원을 볼모로 한듯한 방식은 ‘못난 장수’로 비치기에 십상이다.
이미 KB금융은 1년 중 4분의 1을 엄청난 혼란 속에 보냈다. 지금 당장 결론이 나고 새 경영진이 꾸려져도 혼란을 수습하는데 또 이만큼의 시간은 필요하다. KB금융과 은행은 공식 통로를 통해 ‘지주회사와 은행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관리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KB금융의 어정쩡한 경영 공백 상황은 계속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미 지난달 18일 임기가 만료된 KB생명, KB자산운용, KB투자증권, KB부동산신탁, KB신용정도 등 5개 계열사 대표는 후속 인사를 못 해 임시로 임기를 연장한 상태다. 국민은행의 리스크관리본부장과 상품본부장 등 최근 임기가 끝난 4명의 임원진도 마찬가지다. 천운으로 M&A에 성공한 LIG손보에 대해서도 KB금융의 후속조치는 더디기만 하다.
▲ 임영록(좌)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우) KB국민은행장이 6월 26일 오후 서울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제재심의위원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qwe123@ |
제재심도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금감원장 자문기구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국내 최대 은행의 경영 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좀 더 속도를 내 심의할 수 있었음에도 많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대표 금융회사가 외부 세력과의 다툼이 아닌 내부 경영 분쟁에서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한 만큼 외부 감독기관의 개입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공정한 절차’를 이유로 금융 당국으로서의 절도(節度) 있는 역량과 권위를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KB금융 내부의 일이니 애초부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부에서 해결하도록 했으면 모를까, 개입한 이상 절도 있는 교통정리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많은 이해당사자가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이 책임은 금감원장의 자문기구인 제재심이 떠안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 해결의 컨트롤타워가 가장 지위가 낮은 자문기구이고, 실질적인 당사자들은 모두 이 뒤에 숨은 꼴이다. 당국의 책임자들이 자문기구의 등 뒤에 숨어 보신하는 동안, 웃는 사람들은 결국 이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KB라는 거함은 이미 침몰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뜩이나 KB금융은 전임 회장 집권기에도 유사한 지배구조의 한계를 드러낸 적이 있다. 연이은 이런 모습은 KB금융의 시스템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 문제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국민은행을 비롯해 11개 계열사의 임직원들은 4개월째 안타까운 눈물만 훔치고 있다. 이 사태를 보는 관전자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라도 KB금융과 국민은행의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 KB의 경영진들이 침몰하는 KB의 직원들을 살릴 마지막 방법은 문제 촉발 당사자들의 결자해지밖에 없어 보인다.